묘약을 어디서 구하랴 사무실을 옮기다 잊고 있던 짐 하나가 나왔다. 보따리를 풀었더니 약들이 쏟아진다. 알약, 가루약, 물약, 고약, 첩약, 탕약.....참 골고루도 섞여 있다. 먹는 약, 바르는 약, 붙이는 약, 죄다 있다. 일 년 전 것이 있는가 하면 십 년 전 것이 있다. 양이 놀랍고, 종이 신기했다. 대부분 겉봉을 뜯지도 않은 것..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10.02.17
옛 사람의 풍경 하나 옛 그림 가운데 책 읽는 사람을 그린 장면이 더러 있다. 그런 그림을 보면 독서의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독서는 혼자 해야 맛인데, 조서 후기 화가인 강희언과 유숙은 유별난 그림을 남겼다. 그들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글 읽는 장면을 그렸다. 턱을 괴고 누워 책을 보는가 하면 시라도 음송하는 ..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10.02.09
침묵 속으로 달리다 내 인생에 이제 달리기는 없다. 한 시절은 뻔질나게 달렸다. 조급증 내는 성미라 초짜 주제에 십 킬로미더, 이십 킬로미터는 우습게 봤다. 그 바람에 무릎이 나가고 발목도 잡쳤다. 늦바람난 수캐처럼 날뛰다 된통 당한 꼴이다. 달리는 기쁨을 빼앗긴 나는 풀이 죽었다. 노름에 미친 자는 하늘에 뜬 보..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09.12.30
우연은 누구 편인가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느긋하다. 굼뜬 듯 보여도 부지런한 학자이다. 그가 달뜬 목소리로 내게 전화했다. 보여줄 게 있단다. 만나자마자 액자 하나를 내밀었다. 가로 세로 이십 센티미터 안팎의 자그맣고 오래된 종이에 수묵으로 그린 국화 그림이었다. 입으로는 "누구 거지요?" 물으면서 눈은 낙..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09.12.25
사랑은 아무나 하고, 아무 때나 해라 한 시절 젊은이들이 쓰던 유행어가 있다. '밤일낮잠'. 밤에 일하고 낮에 잔다는 말이다. 화투판 용어인 '밤일낮장'에서 빌려온 우스개다. 아닌 게 아니라 청춘의 정력은 참으로 절륜하다. 그들에게 밤은 없다. 무도장은 플로어에 발 디딜 틈이 없고, 심야극장은 빈 좌석을 찾기가 어려우며, 집에서는 채..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09.12.19
닿고 싶은 살의 욕망 만년필은 '만년토록 쓰는 붓'이다. 참 본때 없는 이름이다. 기능을 과장하고자 붙인 것이 분명할진대, 이 이름으로 만년필의 볼품을 설명하기는 턱없다. 한때 유수필이란 별칭이 있긴 있었다. '흐르는 물 붓'은 그러나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만년필'로 곧장 입에 익어버렸다. 'fountain pen'이라는 만년필..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09.12.17
시들어버린 연꽃 내 사무실이 있는 동네에서 치과 병원을 운영하는 김영환 시인이 시 한 수를 보내왔다. 그는 병원을 한옥으로 지었는데, 당호를 내가 붙여준 인연이 있어 가끔 만나 차를 나눈다. 김 시인은 정치를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는 그를 정치인으로 보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우리는 시창을 한다. 그는..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09.12.12
내 사랑 옥봉(2) 내사랑 옥봉(2).MP3 불면의 밤은 옥봉에게 유독 길었다. 안면을 돕지 못해 나는 안타까웠다. 운명은 삼켰으되 순정은 요동치니 그런 날 옥봉이 쓴 시는 위태롭다. 深情容易寄 깊은 정 드리기는 쉽겠지요 欲說更含羞 말로 하려니 또 부끄럽습니다 若問香閨信 제 있는 곳 소식 알고 싶나요 殘粧獨기樓 벗..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09.12.12
내 사랑 옥봉 내사랑 옥봉(1).MP3 사랑은 방울토마토와 같아서 입을 다문 채 깨물지 않으면 액즙이 튀어나가 버린다. 입안에서 굴리다 깨물면, 목구멍 가득 고이는 액즙의 향내....쓰든 달든 사랑에 누수가 없으려면 모름지기 입을 다물 일이다. 소리치며 사랑에 능한 이는 드물다. 자칫하면 턱이 빠져 말을 못 하니 사..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09.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