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내 사랑 옥봉(2)

그림자세상 2009. 12. 12. 22:39

 

내사랑 옥봉(2).MP3

 

  불면의 밤은 옥봉에게 유독 길었다. 안면을 돕지 못해 나는 안타까웠다. 운명은 삼켰으되 순정은 요동치니 그런 날 옥봉이 쓴 시는 위태롭다.

 

深情容易寄  깊은 정 드리기는 쉽겠지요

欲說更含羞  말로 하려니 또 부끄럽습니다

若問香閨信  제 있는 곳 소식 알고 싶나요

殘粧獨기樓  벗겨진 화장 그대로 누대에 기댑니다

 

  사랑을 동냥하는 짓은 옥봉과는 거리가 멀다. 말로 하기가 구차하고, 앙다문 입에서 사랑의 수액이 샐지도 모른다. 다만 옥봉의 속울음이 화장으로 표현되고, 그 화장 반겨줄 이를 몸서리치게 그리워할 때 옥봉의 속절없는 기다림은 형벌과 같다. 꿈길이 아니라 밤길을 걸어 임의 문전으로 짓쳐 들어갈 것 같아 나는 내심 위태롭게 여겼다. 견뎌낸 옥봉이 가상했고, 종무소식인 옛 임은 괘씸했다.

  기다린들 소식이 오나 잠을 청한들 잠이 오나. 옥봉은 기어코 헛것이 보이고 헛것이 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르고 야윈 옥봉이었지만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기별 없는 기다림이 신병이 되어 백약이 무효인데, 눈물샘은 시도 때도 없이 넘쳤다. 지으니 한숨이요, 한숨에 섞여나온 외마디 시는 처연했다.

 

平生離恨成身病  평생 이별의 한 내 몸에 병이 되어

酒不能療藥不治  술로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릴 수 없어라

衾裡泣如氷下水 이불 덮고 흘린 눈물은 얼음장 아래 흐르는 물과 같아

日夜長流人不知  낮이고 밤이고 흘러가도 아는 이가 없더이다

 

  여느 여자라면 한 줄 서신이라도 인편에 보냈겠지만 옥봉의 기다림은 하염없다. 의연해서가 아니라 방도가 없어서다. 내가 그녀에게 넋 나간 사내가 된 것은 뒷날에 나온 시를 보고 나서였다.

 

 

約條郞何晩  약조 있었거늘 임은 어이 늦으시는가

庭梅欲謝時  뜰에 핀 매화는 이제 지려하는데

忽聞枝上鵲  홀연히 들리는 가지 위에 까치 소리

虛畵鏡中美  헛되이 거울 보며 눈썹을 그린답니다



  옥봉의 최후를 발설하는 것은 잔혹하다. 누구는 자진했다 하고, 누구는 행불로 간주한다. 나는 옥봉이 보고 싶지만 떨어진 세월이 사백 년이나 되어선지 현몽도 안 된다. 옥봉은 여전히 제 꿈에서 옛 임의 문전을 서성거릴 것이다.

내사랑 옥봉(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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