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느긋하다. 굼뜬 듯 보여도 부지런한 학자이다. 그가 달뜬 목소리로 내게 전화했다. 보여줄 게 있단다. 만나자마자 액자 하나를 내밀었다. 가로 세로 이십 센티미터 안팎의 자그맣고 오래된 종이에 수묵으로 그린 국화 그림이었다. 입으로는 "누구 거지요?" 물으면서 눈은 낙관을 훔쳐봤다. '세 번째 갈래 길에 핀 국화'라고 쓴 글씨 아래 붉은 인장이 찍혀 있다. 세 갈래 길은 무언가. 제 집 앞에 길 세 개를 만든 중국의 은사가 있었다. 첫길에 소나무를 심고 둘째 길에 대나무를 심고 셋째 길에 국화를 심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다시 그림을 보니 위에 세 송이, 아래에 한 송이 씩 핀 국화가 제법 큼지막하다. 꽃에 비해 줄기가 가녀리다. 화판 뒤로 숨은 잎들은 오그라들었다. 숙살하는 가을 기운과 마주한 국화는 뭐랄까, 가여운 목숨붙이의 힘겨운 저항처럼 보인다. 붓놀린 솜씨는 그저 수더분한데 애써 꾸미지 않은 기운이 마음에 와닿는 그림이었다.
인장 글씨가 안 보여 떠듬거리자 이 교수는 '산해'라고 일러준다. '산해? 그럼 이산해가 그린 겁니까?" 내가 놀라서 묻자 이 교수는 홍소를 더뜨렸다. 늘 서산마애본존불 같은 미소를 짓는 그가 입이 귀에 걸리게 웃기는 드문 일이다. 이산해가 누군가. 선조대에 영의정을 두 번 지내며 강단 넘치게 살다 간 16세기 문인이다. 그의 숙부는 [토정비결]로 잘 알려진 이지함이다. 이산해는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했지만 전해지는 그림이 거의 없다. 그런대 나는 지금 이산해의 실물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군자 중에서 가장 숫자가 적은 게 국화 그림이다. 전문가들은 남아 있는 국화도 가운데 이산해의 작품을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는다. 이 교수는 "그게 바로 이 그림이오"라고 했다. 율곡의 아우인 이우의 묵국화도 한 점 남아 있기는 하다. 이우는 이산해와 동시대 인물이다. 율곡기념관에 있는 이우의 그 작품은 꽃송이가 서툴게 그려졌다. 이우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내림솜씨 덕인지 초충도를 그려 마당에 던져놓으면 닭이 와서 쪼았다는 일화가 있지만, 국화도는 너무 아마추어 냄새가 난다. 이산해와 이우 중 누가 먼저 국화를 그렸는지는 더 따져봐야 한다. 그중 하나가 내 가까운 이 교수 손에 들어간 사실이 놀라웠다.
어디서 구했는지 묻자 이 교수는 다시 신이 난 표정이다. 경매회사에 들렀다가 이 작품이 나온 것을 우연히 발견했단다. 이산해의 그림임을 눈치챈 그는 조용히 응찰에 나섰다. 별다른 가격 경쟁도 없었다. 최저가인 오십만 원에 작품을 입수했다.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대가 한참 올라가는 조선 중기 그림을, 그것도 가장 오래된 국화 그림을 그 가격에 샀다니 말이다. 나는 덕담보다 샘이 먼저 났다. 꼬인 말투로 "이 교수, 횡재했소이다" 했더니 그는 빙긋이 미소로 응수한다.
이 교수가 간 뒤에도 나는 내내 이산해의 국화가 눈에 삼삼했다. 그는 우연히 그 작품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우연과 마주했다 해도 작품을 경매에 낸 소장자와 경매 관계자는 어떻게 된 노릇일까. 가치를 알고 있었더라면 최저가를 오십만 원으로 매기지는 않았을 터이다. 뻔한 이야기지만 결국 '눈'이다. 작품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횡재도 온다. 게다가 이 교수의 발품은 사시사철 부산하다. 미술동네에 떠도는 말로, 먹이는 냄새를 풍기기 마련이다. 발견은 우연이었다 해도 그의 발걸음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국화를 그린 이산해는 고려시대 문인인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목은도 국화를 어지산히 아꼈나보다. 그는 <국화를 보고 느끼다>라는 칠언시를 썼다. 앞머리가 '인정이 어찌 사물의 무정함과 같을까, 갈수록 마주치는 일에 불평일세'로 시작한다. 그 시의 마지막 두 구가 뜨끔하다.
우연히 동쪽 울타리로 가니 부끄러움이 얼굴 가득
진짜 국화를 가짜 도연명이 보기 때문이라네
'동쪽 울타리에 핀 국화'는 진나라 처사 도연명이 특허낸 시의다. 국화의 정취는 도연명쯤 되어야 만끽할 수 있는데, 아취가 모자란 사람이 울타리 곁에서 얼쩡대는 짓이 부끄럽다고 목은은 말한다. 목은의 '우연히'는 겸손한 표현이다. 우연은 인연을 맺기도 한다. 하지만 우연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우연은 준비된 마음을 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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