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닿고 싶은 살의 욕망

그림자세상 2009. 12. 17. 00:25

  만년필은 '만년토록 쓰는 붓'이다. 참 본때 없는 이름이다. 기능을 과장하고자 붙인 것이 분명할진대, 이 이름으로 만년필의 볼품을 설명하기는 턱없다. 한때 유수필이란 별칭이 있긴 있었다. '흐르는 물 붓'은 그러나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만년필'로 곧장 입에 익어버렸다. 'fountain pen'이라는 만년필의 원뜻을 살리려면 처음부터 '샘붓'으로 옮겨애 마땅했다고 주장하는 옛 문인도 있었다. 수명이 오래간다는 점만 강조한 것은 명명자의 수사학이 부족한 탓이다. 하기야 연필도 거기서 거기다. 흑연 가루로 만들었다고 '연필'이라고 했다. 'pencil'의 라틴어 어원을 찾아보니 '작은 꼬리'라고 되어 있다. 이 앙증스러운 뜻을 도외시하고 재료를 이름에 박아버린 편의주의자가 누군지 궁금하다. 이름은 가끔 본색을 욕보이기도 한다.

  이름이 밉다고 만년필의 살가움이 어이 가는 건 아니다. 만년필은 나의 오래된 애물이다. 이십 년을 훌쩍 넘긴 단짝, 내 만년필의 상표는 몽블랑이다. 미끈한 아랫도리를 검은 스타킹으로 감춘 손안의 연인이다. 체구가 단단해 강단 있는 사내로 남들은 오해하지만 나는 몽블랑을 내 손길에 목마른 여자로 여긴다. 알다시피 몽블랑은 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수제품이다. 뚜껑 머리에서 빛나는 하얀 별 로고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몽블랑이라서, 명품이라서 사랑하는 게 아니다. 고백하건대, 사랑한 여인이 준 것이어서 사랑한다. 그 여인은 이제 가고 없다. 사람이 가고 사랑이 남았다. 옛 사람의 그림자는 희미하지만 몽블랑은 옛 사랑의 선연한 자취다. 그러니 몽블랑으로 글을 쓰면 꺼진 열정이 되살아나는 듯 황홀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나에게 만년필은 미완성의 사랑이자 안타까운 페티시즘이다.

  만년필은 무엇보다 감촉의 설렘을 촉발한다. 살은 살에 가닿고 싶다. 만년필은 닿고 싶은 살의 욕망을 필체로 드러내는 도구다. 필기구의 촉감은 필기의 내용을 장악한다. 서예를 보면 안다. 부드러운 붓털의 성질이 붓글씨의 겉과 속을 좌우하지 않는가. 만년필도 마찬가지다. 만년필로 글씨를 쓰면 푸르고 검은 잉크 색의 단순한 선택을 넘어 갖가지 미감이 발현된다. 만년필은 마르고, 축축하고, 진하고, 묽은 느낌을 구사한다. 그뿐이 아니다. 글씨의 표정을 다채롭게 살려내기도 한다. 굵고 가늘고, 빠르고 더디고, 강하고 약하고, 윤택하고 칼칼한 글씨의 모양을 쓰는 이가 마음대로 연출한다. 나의 몽블랑은 촉이 갈라진 지 오래다. 글씨를 쓰면 획이 툭툭 끊긴다. 나는 촉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았다. '파필의 묘미'를 거기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파필은 서예에서 일부러 붓끝이 갈라지게 쓰는 것을 말한다. 파필로 쓰면 '비백', 곧 '날아다니는 여백'의 효과를 맛볼 수 있다. 붓글씨에서나 가능한 미감을 만년필로 즐기는 셈이다.

  나는 만년필로 한시 쓰기를 즐긴다. 주로 남녀의 농염한 사랑이 주제가 된 시를 베껴 쓴다. 하필 그런 시냐고 남들이 묻는다. 그들에게 만년필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 연유를 털어놓을 순 없다. 소이부답일 뿐. 몇 년 전의 일이다. 가까운 어른들을 모신 술자리에서 주흥에 못 이겨 십여 수의 한시를 쓴 적이 있었다. 만년필 글씨에서 파필의 붓글씨 흥취가 나는 것이 그분들은 신기했던 모양이다. 시의 내용보다 글꼴이 마음에 든다고 하는 분도 있었다. 유독 한 분이 막 쓰기를 끝낸 시 하나의 뜻을 물었다. 청나라 주당이 써서 조선의 이상적에게 건네준 대구였다. "꽃이 농염하면 나그네의 귀밑털이 부끄럽고, 술은 허름해도 사람 사는 정을 낫게 하네." 뜻풀이를 들은 그분은 무릎을 치며 거푸 잔을 비웠다.

  며칠 뒤 그분에게 몽블랑 하나를 사서 보냈다. 내가 존경하는 분인데다 만년필로 쓴 한시에 유난히 흥감해 하기에 선물한 것이다.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었다. 그분과 다시 합석한 것은 제법 날들이 흐른 뒤였다. 그분이 주머니 속에서 몽블랑을 꺼내 나에게 돌려주었다. 쓴 미소를 머금으며 하신 그분 말씀. "만년필의 감촉이 너무 농염해서 말이야. 내 늙음이 부끄러워져서." 주당의 시를 되새김질해 본 그분이었다. 몽블랑이 부끄러우면 나도 늙어갈 무렵일 터인데 늙어도 부끄럽지 않기가 어렵다. 아니, 늙어서도 부끄러움을 모를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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