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내 사랑 옥봉

그림자세상 2009. 12. 12. 11:25

 

내사랑 옥봉(1).MP3

 

  사랑은 방울토마토와 같아서 입을 다문 채 깨물지 않으면 액즙이 튀어나가 버린다. 입안에서 굴리다 깨물면, 목구멍 가득 고이는 액즙의 향내....쓰든 달든 사랑에 누수가 없으려면 모름지기 입을 다물 일이다. 소리치며 사랑에 능한 이는 드물다. 자칫하면 턱이 빠져 말을 못 하니 사랑 고백도 어렵다.

   내 어쩌다 남의 소실에게 마음을 빼앗겼는지, 여기서 장광설을 펴진 않겠다. 시작은 가여워서 그랬다. 그녀는 정실이 되기를 포기했다. 재능 출중하고 미색 발군이지만 운명이 그녀에게 관대하지 않음을 예감한 모양이다. 그 사연을 자기 입으로 털어놓은 적은 없다. 지난날의 처신과 詩作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운명에 도전하는 일을 영웅시하는 것은 경쟁사회의 몽상이다. 도전받는 운명은 운명이 아니다. 몽매의 한 시절, 그녀는 소실 자리에서도 버려졌지만 거부하지 않은 채 비극적 운명을 시로 옮기며 순응했다. 나는 그것이 가여워서 그녀를 마음에 품었다. 내 연정에 밑 구린 바 없어 밝히건대, 그녀의 이름은 옥봉이다.

  남편에게 내쫓긴 옥봉은 방랑했다. 기약 없는 방랑길에서도 옥봉은 임 향한 일편단심을 훼손하지 않았다. 내 비록 옥봉을 마음을 두었으나 손 한번 잡은 적 없고, 손 잡힘이 옥봉의 수절을 흔들 리도 만무했다. 전하고 싶은 말은 굴뚝같았지만 참고 눌렀다. 혹 내 입 밖으로 나왔다면 그것은 사랑에 좌절한 옛사람의 말씀일 터였다. "사람에 빠질까보냐. 차라리 연못에 빠져라(溺于人也 寧溺于淵".) 도리가 없어 옥봉은 시에 빠졌다. 그즈음 내가 들은 절창은 이렇다.

 

近來安否問如何 요즘 안부를 물으셨나요

근래안부문여하

月倒紗窓妾恨多 달빛이 깁창에 깃들면 저의 한이 크답니다

월도묘창첩한다

若使蒙魂行有跡 꿈길을 걸어가도 만약 발자국이 남는다면

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 그대 문 앞 돌길이 반쯤 모래가 되었을 겁니다

문전석로반성사

 

  황진이의 그림자가 설핏 보이는 자구이지만, 명색이 반가로 출가했던 옥봉이 기적에 오른 여인의 자취를 흉내내기야 했겠는가. 애련한 여인의 마음이 공교롭게 상통한 까닭일 게다. 이 시에서 알아차렸겠지만 옥봉은 소맷자락 붙들며 매달리는 여자는 아니다. 입안의 사랑이 쓸개맛이어도 지그시 깨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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