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에 스친 인연 나는 '이병주'라는 고봉준령을 오를 수 없다. 까마득해서 주눅이 든다. [소설 알렉산드리라]에 가기도, [관부연락선]을 타기도, [지리산]과 [산하]를 밟기도 힘이 부치고 [쥘부채]를 잡거나, [행복어 사전]을 뒤지거나, [그해 오월]을 기억하기도 깜냥이 안 된다. 포기가 마땅하거늘 용심을 부리는 것은 가..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10.08.05
방 안에 꽃 들여 놓으시지요 일본의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한국에 애독자가 많다. 메이지유신의 영웅을 그린 [료마가 간다]로 일본의 '국민작가'가 된 그는 조선 도공의 삶을 소재로 한 [고향을 어찌 잊으리까]로 우리에게 낯익다. 내가 일하는 출판사에서 그의 한국 기행문 두 권을 낸 적도 있다. 책이란 신통해서 글이 마음에..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10.08.04
입 다문 모란, 말하는 모란 한번 떠나간 잠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릴없이 문득 서가를 본다. 서가에 꽂힌 책들은 앵돌아앉았다. 집게손가락으로 책등을 죽 훑어나간다. 잠시 손이 멈춘 곳, 몸피 튼실한 책이 눈에 들어온다. 먼지 낀 종이상자를 벗기자 푸른 장옷을 걸친 옥골이 드러난다. 손가락 점고고 간택한 이 책이 오늘 ..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10.08.01
연꽃 있는 사랑이야기(2) 여인의 표정은 깜찍하고 새침하다. 뾰로통한 낯빛처럼 보이기도 한다. 살집이 도톰한 얼굴에 눈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다. 오른쪽으로 잔뜩 몰린 눈동자도 기막히다. 그녀는 어깨 위의 연꽃을 곁눈질로 살피는 낌새다. 물론 촛대에 꽃힌 촛불이 꺼지지 않는지 감시하는 눈초리다. 하지만 감상하는 이에 ..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10.07.23
연꽃 있는 사랑이야기(1) 고려 충선왕의 연애담은 애틋하다. 그는 원나라에 머물면서 한 여인과 정을 나누었다. 환국을 앞둔 날, 여인이 그의 소매를 잡고 놓지 않았다. 그는 연꽃을 꺾어주며 몌별袂別했다. 몸은 오고 마음은 둔 탓일까. 그리움이 사무쳐 근황이나마 듣고자 하였다. 밀명을 받고 원나라에 간 사람은 심복인 이..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10.07.21
지나가는 것이 지나가는구나(2) 귀 없는 돌부처는 아닌 게 아니라 절묘하다. 말하지 않을 뿐더러 듣지도 않는, 적요한 깨달음을 굴산사 폐허는 일깨우려는 것인가. 우리는 벌판 초입에 놓인 당간지주를 올려다보았다.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보물이다. 몸돌은 들까부는 장식이 없다. 덤덤하고 졸박한 모양새로 사라진 거찰의 위용을..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10.07.21
이중섭의 소가 맛있는 이유 잇속 챙기려는 작자들이 간롱을 떠는 통에 이중섭 그림이 한동안 혼꾸멍났다. 가짜가 진짜로 행세하고 섭치가 알천으로 둔갑햬씨 때문인데, 미술시장에서 애먼 그림이 매기가 떨어지고 이중섭의 명성을 홀시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가까 그림이 활개쳐 세상을 속일지언정 그 작가의 삶과 작품이 덩달..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10.07.21
'누드 닭'의 효험 그날 요리는 '누드 닭'이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 한 음식이다. 일행은 호기심에 부풀었다. 요리가 나올 동안 화제는 각국의 '털 없는 닭'으로 쏠렸다. 이스라엘 과학자들이 선보인 닭은 웬만큼 알려진 뉴스다. 수년 전 그들은 깃털 없는 닭을 잡종교배로 만들었다. 이 누드 닭은 볼품없는 꼬락서니다. ..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10.07.10
값비싼 민어를 먹은 죄 [신의 물방울]의 작가인 아기 다다시는 와인에 얽힌 이야기를 맛깔나게 푼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는 로마네콩티를 마셔봤단다. 어찌나 황홀했든지 맛과 여운과 향기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극찬한 글을 썼다. 못 마신 독자에게 염장을 지르던 그의 글은 말미에 가서 웬걸, 떨떠름한 심사를 밝힌..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10.02.25
얘야, 새우는 너 먹어라 후텁지근한 한낮, 인사동에서 모과차를 마셨다. 달콤한 마이 혀끝에 감기자 어릴 때 다니던 외가가 생각났다. 나는 감기에 걸려 종일 쩔쩔맸다. 보다 못한 외숙모가 꿀에 재운 모과를 건넸다. 달디단 그 맛은 참말이지, 꿈결 같았다. 대여섯 살의 영혼도 팔 수 있다면, 꿀을 사고 싶었다. 밤새 퍼먹었더.. 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2010.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