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침묵 속으로 달리다

그림자세상 2009. 12. 30. 00:45

  내 인생에 이제 달리기는 없다. 한 시절은 뻔질나게 달렸다. 조급증 내는 성미라 초짜 주제에 십 킬로미더, 이십 킬로미터는 우습게 봤다. 그 바람에 무릎이 나가고 발목도 잡쳤다. 늦바람난 수캐처럼 날뛰다 된통 당한 꼴이다. 달리는 기쁨을 빼앗긴 나는 풀이 죽었다.

 

  노름에 미친 자는 하늘에 뜬 보름달을 보고도 팔광 잡았다고 한다든가. 내가 영판 그 짝이 되었다. 텔레비젼에서 마라톤 중계만 나오면 오금이 저린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심장 박동은 요란하다. 내 깐에는 이미지트레이닝한답시고 손에 땀까지 쥔다. 앉은뱅이 용쓰는 애비가 딱한지 아들은 퉁을 준다. "아빠, 두 시간 넘게 똑같은 장면만 나오는데 뭐 볼 게 있어요?" 아들은 지루한 시청을 못 견딘다. 경박단소가 아들의 즐거움이다. 인생은 지루해서 그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달리지만, 달리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면 인생을 모른다는 것을 이 아이가 알까.

 

  올해 뉴욕마라톤대회는 평생 두 번 보기 어려운 장면을 연출했다. 세계신기록 보유자인 케냐의 폴 터갓이 일등을 차지했다. 이등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헨드릭 말라야. 두 사람의 기록은 0.32초 차이였다. 이 차이를 백 미터 경주로 바꾸면 약 만 분의 팔 초 차이라고 한다. 이는 눈 깜짝하는 차이가 아니라 숨 막히는 차이다. 백 리 길을 달려온 사람들이 0.32초 차이로 승패를 가르는 것은 정말이지 참혹하다. 사백 미터를 남겨놓고 두 사람은 남은 기력을 쥐어짜며 전력질주했다. 마지막 일 미터 앞에서 말라야는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다리가 꼬이면서 나뒹굴었다. 결승 테이프는 터갓의 가슴에 닿았다. 말라야는 "내 힘은 바닥났다"고 말했다. '백척간두진일보'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흔히 '주마가편'과 비슷하게 쓰이지만 '죽음을 각오하다'가 본뜻이다. 한 발 더 내미는 순간, 그곳은 허공이자 나락이다. 심장이 터지는 힘으로 말라야는 가슴을 내밀었다. 백 리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도 인생은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가혹한 채찍을 든다.

 

  지난 일요일 저녁모임에 나갔다가 춘천마라토대회에서 처음 완주한 선배를 만났다. 그는 경기 당일의 흥분을 채 가라앉히지 못했다. 주최 측이 휴대폰으로 완주 시간을 알려주었다며 다섯 시간이 넘는 기록이 찍힌 문자 메시지를 흐뭇한 표정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애초 십 킬로미터만 달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 이상 달려본 적도 없었다. 그랬는데 복어 뱃살 닮은 아저씨가 앞서고 추풍낙엽 같은 아가씨가 추월하더란다. 부끄럽다가 나중에는 오기가 발동했다는 것이다.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하다가 어언 삼십 킬로미터 지점을 넘길 즈음이었다. 정신이 혼미하고 몸은 초주검이 되었다. 그때 언뜻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햇살에 부서지는 강물, 떠다니는 구름들......그는 뻔한 풍경이 생시에 보는 것과 다르게 느껴졌다. 몹시 황홀하고 아름다워서 달리는 자신을 잊었고, 결승점을 통과하고나서야 정신을 찾았다.

 

  나는 알 것 같았다. 마라톤 완주는 한 적이 없지만 달리는 나에게 펼쳐지는 풍경은 기억한다. 죽을힘을 다해 한 발짝씩 옮기는 마라토너에게 스쳐가는 풍경은 아무런 부축이 되지 못한다. 달리는 자에게 풍경은 무자비한 침묵이다. 추호의 위로도, 일말의 동정도 보여주지 않는다. 풍경은 마라토너의 고독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달리는 자들끼리의 맹렬한 소외감도 무섭다. 그때 스쳐가는 풍경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서럽다. 빈사의 상태에서 보이는 풍경은 그러나 서러워서 아름다운 것이다. 달리는 자의 살인적인 지루함과 고단함, 이를 지켜보는 풍경의 무서운 침묵. 침묵을 이기지 못하는 인생은 낙오한다. 그것이 마라톤의 본색이다.

 

  선배는 사진기사로 일할 때 마라톤을 여러 번 취재했다. 그는 지금까지 찍은 마라톤 사진이 헛것이었다고 고백했다. 침묵하는 풍경을 달리는 자의 눈으로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달리는 그를 내년 마라톤 중계에서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