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묘약을 어디서 구하랴

그림자세상 2010. 2. 17. 01:33

  사무실을 옮기다 잊고 있던 짐 하나가 나왔다. 보따리를 풀었더니 약들이 쏟아진다. 알약, 가루약, 물약, 고약, 첩약, 탕약.....참 골고루도 섞여 있다. 먹는 약, 바르는 약, 붙이는 약, 죄다 있다. 일 년 전 것이 있는가 하면 십 년 전 것이 있다. 양이 놀랍고, 종이 신기했다. 대부분 겉봉을 뜯지도 않은 것들이다. 희한하게도 내가 산 약은 없었다. 하나같이 선물 받은 것만 모아놓았다. 약이 선물이 되는지 모르겠다. 준 사람은 선물이라고 했다. 그들은 약을 건네며 "건강하세요"라는 덕담을 빠뜨리지 않았다. 왜 이리 많은 약을 받은 것일까. 내가 병치레 잦은 약골로 보였나 싶어서 민망했고, 먹으라고 준 선물을 입에 댖도 않은 것이 미안했다. 약통의 먼지를 털어내며 그들의 마음씨를 돌이켜보았다.

  촌그러운 포장지를 붙인 약에 먼저 눈이 간다. 오래전 미국에 사는 화가가 북한에 가서 사온 것이다. 그는 약 이름이 재미있다고 깔깔 웃었다. '다시마 알'이다. 다시마에 무슨 알이 있을까 보냐. 내용물은 알약이다. 다시마에서 추출한 성분을 환으로 만들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따지자면 약품이 아니라 식품이다. '식약동원'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내남없이 몸에 좋은 것은 다 약이라고 하니 그냥 넘어가자. 아닌 게 아니라 효능 설명서를 읽었더니 약을 뺨친다. 동맥경화증을 예방하고 치료한다. 중금속 해독에 좋다. 한술 더 떠서 방사선 피해 방지까지 한단다. 나는 피폭의 염려가 거의 없는 사람이다. 재미화가가 별걸 다 걱정해 주었구나 싶었다. 아니, 아닐지도 모른다. 최근 피폭을 상상하는 사태가 이 땅에 벌어졌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선견지명이 있다고 해야겠다. '다시마 알'을 만든 북한은 괘씸하다. 병 주고 약 주는 셈이다. 하루 세 번 세 알씩 먹으라는데, 지금이라도 먹어볼까 하다가 다시 보니 유통기한이 오 년이나 지났다. 개똥이 아니라 '다시마 알'도 약에 쓰려면 없다.

  이래저래 몸 보하기는 글렀구나 하다가 플라스틱 용기에 약에 손이 미쳤다. 무슨무슨 '골드'라고 되어 있다. 이것도 건강보조식품이다. 시골사는 한 여성이 연말선물로 주었다. 잘 되었다싶어 성분과 함량을 살펴보았다. 눈이 번쩍 뜨였다. 자라의 특정 부위를 순간적으로 얼렸다 말린 뒤 잘게 부수어 분말로 만들었다고 한다. 자라는 강정제로 쓰인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게다가 강력한 성분이 첨가되었다. '질 좋은 캐나다산 물개에서 짜낸 기름'이 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선물을 준 여성이 한 말을. 그녀는 "건강하세요" 하지 않고 "힘 내세요" 했다. 말랑말랑한 캡슐을 만지작거리며 그 여성을 그려보았다. 배려가 고마워서 눈시울이 뜨겁다. 니 '단백질과 미네랄, 비타민의 우수한 공급원을 장복하면 힘 좀 쓰게 될지 모른다. 제품 맨 아래쪽에 유통기한과 권장소비자가격이 씌어 있다. 가격은 이십팔만 원. 이 정도 고가라면 효능에 절로 믿음이 생긴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나. 이마저도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 헛물켜다 만 꼴이다.

  보따리에 든 숱한 약은 버리고 선물한 사람의 마음은 정겹다. 돌아보면 그들은 나와 교분이 두텁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유독 나에게 약을 권한 적이 없는 선배의 얼굴이 겹친다. 그의 말이라면 콩 심은 데 팥 난다고 해도 믿었다. 그는 약 대신 말로 때웠다. 조선 후기 한의학자로 '사상의학'을 창안한 이제마의 말이다. "삶의 엉덩이에는 게으름이 들어 있고, 어깨에는 교만함이, 허리에는 음란함이, 심장에는 욕심이 들어 있다." 게으름과 교만함과 음란함과 욕심이라니, 이야말로 만병의 근원 아닌가. 몸이 아예 병덩어리다. 몸은 마음에 의지하고 마음은 몸에 깃드니 어느 세상에서 묘약을 구하겠는가. 아무래도 백약이 무효일 성 싶다. 그 많은 약을 선물한 친구들아, 섭섭하겠지만 도리 없다. 무슨 수가 있겠는가. 아무 수가 없다. 나는 약 안 먹고 버티련다. 삶은 고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그것이 직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