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는 가상의 인물이다?!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로 칭해지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 등 그의 주옥같은 걸작들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위대한 작가의 삶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때문에 호사가들을 중심으로 셰익스피어가 실존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단언했던 대문호 셰익스피어. 그는 정말 가상의 존재일까.
박소란 기자 psr@sed.co.kr
셰익스피어는 전 세계 누구에게나 친숙한 이름이다. 그에 관한 저술만 따져도 수백, 수천만 권이 넘는다. 한 통계에 의하면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이 언급된 책이 적어도 하루에 한 권 이상 출간된다고 한다.
이처럼 책과 영화를 통해 시대적 트렌드에 맞춰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있는 셰익스피어.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삶을 면밀히 다룬 평전은 단 한 권도 없다. 삶의 많은 부분이 그야말로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오늘날의 수많은 셰익스피어 전기(傳記)는 ‘5%의 사실과 95%의 억측’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영국의 유명 작가 앤서니 홀든의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경우 아예 “뛰어난 셰익스피어 전기는 애당초 있을 수 없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셰익스피어의 명성을 생각해 보면 그에 대한 기록이 이토록 드물다는 것 자체가 무척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셰익스피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학파를 형성할 정도임에도 말이다.
수수께끼 같은 삶
우리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대략 이렇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16세기 중반, 영국 잉글랜드의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어 폰-에이번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1950년경 고향을 떠나 런던에서 배우와 극작가로 활동했다.
또한 셰익스피어는 1616년 사망하기까지 총 37편의 희곡과 154편의 시를 남겼는데 시의 경우 생전에 발표한 두 편 외에는 모두 사후에 책으로 공개됐다. 그는 귀족 집안의 자제도 아니었으며 대학교육을 받지도 못했지만 그런 사람들을 능가하는 탁월한 언어 구사력과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력을 바탕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 문장가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것뿐이다. 그 이상은 명확한 게 별로 없다. 특히 사생활은 그야말로 신비로운 수준이다. 심지어 생년월일조차 명확하지 않다. 포털사이트 등에는 1564년 4월 26일 태어나 1616년 4월 23일 숨진 것으로 표시돼 있지만 1564년 4월 26일은 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유아 세례를 받은 날일 뿐이 다. 그래서 사망 시의 나이도 이에 근거해 대략 50~60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 역시 밝혀진 바가 없다. 다행스럽게 동시대의 극작가 로버트 그린이 1592년 동료에게 보낸 서한에서 셰익스피어를 언급한 기록이 있어 이때쯤에는 이미 그가 런던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극작가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참고로 로버트 그린은 서한에서 셰익스피어에 대해 “학식 낮은 촌뜨기가 벼락출세를 하 더니 누구 못지않게 잘 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했다.
어쨌든 이를 단서로 학자들은 극작가로서 셰익스피어의 활동기를 대략 1590년부터 1610년까지로 추정한다. 물론 이 시기 동안 구체적으로 그가 무슨 활동을, 어떻게 펼쳤는지는 알지 못한다.
또 셰익스피어는 말년에 상류계급인 ‘신사(gentleman)’로 인정받을 만큼 저명인사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그즈음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왜 은퇴를 결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사인(死因)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결국 고향땅에서 생을 마감한 셰익 스피어의 시신은 마을 내 홀리트리니티 교회에 안장됐다. 여기서 한 가지 눈 여겨 볼 점은 그의 묘비에 적힌 글귀다.
‘여기 덮인 흙을 파헤치지 마시오. 이 무덤의 돌을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는 축복이, 나의 뼈를 움직이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리.”
이는 셰익스피어가 직접 쓴 글로 알려져 있지만 역시 확증은 없다. 다만 무덤을 건드리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에 얽힌 비밀들과 무관하다고 여길 수 없는 대목임에는 틀림없다.
이와 관련 지난 2008년 홀리트리니티 교회는 셰익스피어 무덤을 보수해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교회 측은 위와 같은 경고를 무릅쓰고 무덤을 손보는 일에 상당한 심리적 부담이 따랐지만 400여년간 사람들의 통행으로 훼손된 무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무덤 속까지 파헤치지 않아서인지 다행히 지금까지 별다른 저주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오늘날의 수많은 셰익스피어 전기(傳記)는 5%의 사실과 95%의 억측으로 이뤄진 것일지도 모른다.
가짜와 진짜
작품 외에는 온통 베일 투성이인 셰익스피어의 종적을 보면 그의 실체를 의심하는 것도 그리 무리가 아니다. 가장 극단적인 것으로 셰익스피어 자체가 허구의 존재며 그가 썼다고 알려진 작품들은 모두 다른 누군가의 장착물이라는 주장이 있다.
유명인에게 뒤따르는 가십이라 치부하기에도 도가 지나친 수준이지만 그 흔한 친필 원고조차 단 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고 유언에서도 자신의 작품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구심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아울러 앞서 언급했듯 작품의 완성도와 사적인 환경이 극히 상반된다는 사실도 의심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방대한 지식과 상당수의 어휘가 사용됐지만 당시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고향에는 별달리 읽을 만한 서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학교에 해당하는 그래머스쿨 (Grammar School)을 졸업했을 뿐 제대로 된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부모와 아내, 자식 등 온 가족이 모두 문맹이었다고 한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
셰익스피어가 허구의 인물이라는 논란은 최근에 불거진 것도 아니다. 그 동안 많은 학자들이 문학 천재인 셰익스피어가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일 리 없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일찍이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의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는 소설가 찰스 디킨스도 그의 진위 여부를 밝혀내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최근에는 영국 내 유명 인사 287명이 공식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가 정말 허구의 인물이라면 그의 이름으로 희대의 걸작을 남긴 진짜 셰익스피어는 도대체 누구일까. 현재 여러 명의 후보가 거론되고 있는데 그중 3~4명에게 많은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가장 유력한 이로는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꼽힌다. 당시 그 정도의 문장력을 구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사실상 16세기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베이컨이 유일했다는 판단에서다.
사실 베이컨은 희곡을 써서 출세를 했고, 돈도 모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적으로 상류사회 인사의 희곡 집필은 명예롭지 못하며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다.
베이컨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국회의원, 제임스 1세 치하에서 법무장관을 위시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자작(viscount)의 작위까지 얻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자신을 감추고 셰익스피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웠다는 것. 공교롭게도 셰익스피어가 낙향한 시기도 베이컨이 법무장관에 취임하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다른 사람으로는 극작가 겸 시인인 크리스토퍼 말로가 언급된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연극계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그에게는 사뭇 특이한 이력이 있다. 장학금으로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그는 재학 중 영국 첩보기관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진보적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신을 부정하는 논문을 썼다가 체포령이 내려지는 등 29년의 짧은 생애 동안 파문이 줄을 이었다. 마지막도 극적이다. 그는 주점에서의 사소한 술값 다툼 끝에 동료의 칼에 찔려 숨졌다.
말로를 셰익스피어로 믿는 사람들은 그의 삶의 궤적과 연관된 해석을 제기한다. 어떤 심각한 위기에 처한 말로가 죽음을 위장해 정체를 숨기고 셰익스피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썼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가 정말 허구의 인물이라면 그의 이름으로 희대의 걸작을 남긴 진짜 셰익스피어는 도대체 누구일까.
오랫동안 셰익스피어의 실제 모습으로 알려졌던 '플라워 초상화'. 몇 년 전 영국학자들에 의해 가짜임이 밝혀졌다.
셰익스피어의 얼굴도 가짜다?
항간에는 옥스퍼드 가문의 17대 백작 에드워드 드 비어가 진짜 셰익스피어라는 주장도 흘러나오고 있다. 그는 귀족 집안 출신답게 폭넓은 교육과 지식을 바탕으로 글을 썼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제3의 필명을 필요로 했다는 것.
이 가설의 지지자들은 셰익스피어라는 필명이 옥스퍼드 가문 문장(紋 章), 즉 부러진 창을 휘두르고 있는 사자 모습에서 유래됐다고 여긴다. 흔들다(Shake)와 창(Spear)이 합쳐져 셰익스피어가 됐다는 얘기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미국의 극작가 폴 스트라이츠는 저서 ‘옥스퍼드: 엘리자베스 1세의 아들’에서 셰익스피어가 에드워드 드 비어 백작이며 엘리자베스 1세의 사생아라는 주장을 펼쳤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여왕이 사실은 여러 명의 사생아를 낳았으며 그 첫 째인 셰익스피어를 16대 백작인 존 드 비어 부부에게 맡겨 에드워드 드 비어로 양육했다는 것이다. 스트라이츠는 셰익스피어 자신도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햄릿’ 등의 작품에 그런 내용을 반영했다고 설명한다.
이 밖에도 셰익스피어의 실체라며 거론되는 인물은 어림잡아 30~40명이 넘는다. 학계에서는 시대상을 고려해 셰익스피어가 한 명의 개인이 아닌 여러 명으로 구성된 조직이었을 것이 라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한다. 당시에는 공동 창작이 워낙 빈번한 일이었다는 이유에서다.
더구나 셰익스피어가 활동할 무렵 옥스퍼드대학과 캠브리지 대학의 지식인들 중에는 몰래 연극에 참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중 몇몇이 사회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셰익스피어라는 이름 뒤에 숨었을 개연성을 배재할 수 없다고 해석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희곡 ‘햄릿’의 한장면. 셰익스피어는 이외에도 ‘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 ‘맥 베스’ 등 무수한 걸작을 남겼다.
한편 일각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비밀을 그의 초상화에서 찾기도 한다. 여러 점의 셰익스피어 초상화 가운데 ‘플라워 초상화’는 얼굴 부위에 묘한 음영이 드리워져 있다. 얼핏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에 대해 호사가들은 그림 속 인물이 셰익스피어라는 가면을 쓰고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 이렇게 그려졌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로 여겨졌던 플라워 초상화는 몇 년 전 가짜임이 밝혀졌다. 영국의 초상화 전문가들이 그림 속에서 1814년경의 안료인 황연(黃鉛) 성분을 확인하고, 셰익스피어의 사후 200여년 뒤에 그려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전문가들은 왼쪽 귀에 황금 귀걸이를 건 모습의 ‘찬도스 초상화’가 실제 셰익스피어의 모습과 가장 비슷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이 또한 가짜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저주?
셰익스피어의 묘비에는 ‘나의 뼈를 움직이는 자에게 저주가 내릴 것’이라는 경고가 적혀 있다.
과학적 실체 규명
주류 학계의 분석은 어떨까. 이 모든 추정들은 그저 입담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학계는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16세기만 해도 지금처럼 체계적 기록 보존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셰익스피어 뿐만 아니라 당대의 다른 저명인사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셰익스피어 연구가이자 ‘셰익스피어와 마시는 한 잔의 커피’, ‘셰익스피어 그리고 그가 남긴 모든 것’의 저자 스탠리 웰스는 셰익스피어의 진짜 정체를 둘러싼 구구한 주장들이 하나같이 속물 근성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의문의 배경에 시골 출신 극작가가 엄청난 걸작을 탄생시켰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오만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웰스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지만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의문과 비밀들이 그에 관한 세간의 관심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영리한(?) 학자와 작가들은 현재 셰익스피어의 삶에 가까이 접근, 지금껏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례로 2009년 영국의 작가 찰스 니콜은 ‘실버스트리트의 하숙인 셰익스피어’라는 저서에서 셰익스피어가 1600년대 초 런던 실버스트리트에 살았다고 주장하고 그에 관한 법정 공문서 등을 제시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셰익스피어는 한창 작품 활동에 전념하던 시절을 외국인 밀집지역인 한 도시의 뒷골목에서 보낸 것이 된다.
과학계에서도 점차 진화해가는 과학 기술을 통해 셰익스피어의 실체 파악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프랑스, 아프리카 등 이국적 배경이 자주 묘사된 점과 관련해 니콜은 “정작 셰익스피어는 한 번도 영국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며 “이국적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외국인이 가득한 실버스트리트에서 지내며 상상의 여행을 떠났을 뿐”이라고 말했다.
세익스피어에 대한 관심은 단지 문학계에 한정되지 않는다. 과학계에서도 실체 파악에 애를 쓰고 있다. 점차 진화해가는 과학 기술을 역사 연구에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올 6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비트바테르스란트대학의 생물학자 프란시스 새커리 박사팀은 셰익스피어의 사인 규명을 위해 영국 의회에 셰익스피어의 무덤 발굴 신청서를 제출했다. 연구팀은 무덤 발굴 후 셰익스피어의 생전 건강상태를 분석, 정확한 사인을 밝혀냄과 동시에 최첨단 3D 기술을 동원해 생전 모습을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새커리 박사는 10년전 법의학 기술로 셰익스피어의 집 안마당 땅속에 묻혀 있던 24개의 대마초를 발견한 적도 있다. 이에 그는 “셰익스피어는 대마초 흡연자며 그의 천재성은 마리화나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약하자면 지금으로선 셰익스피어에 관해 100% 확실한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그의 실체를 확인해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실 존 인물인지, 가상의 인물인지가 아닐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감동이야말로 셰익스피어의 본질일지 모른다. 먼 훗날 과학기술에 의해 실체가 드러나 그를 둘러싼 미스터리한 베일이 벗겨지더라도 이 점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위대한 작가의 삶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때문에 호사가들을 중심으로 셰익스피어가 실존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단언했던 대문호 셰익스피어. 그는 정말 가상의 존재일까.
박소란 기자 psr@sed.co.kr
셰익스피어는 전 세계 누구에게나 친숙한 이름이다. 그에 관한 저술만 따져도 수백, 수천만 권이 넘는다. 한 통계에 의하면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이 언급된 책이 적어도 하루에 한 권 이상 출간된다고 한다.
이처럼 책과 영화를 통해 시대적 트렌드에 맞춰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있는 셰익스피어.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삶을 면밀히 다룬 평전은 단 한 권도 없다. 삶의 많은 부분이 그야말로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오늘날의 수많은 셰익스피어 전기(傳記)는 ‘5%의 사실과 95%의 억측’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영국의 유명 작가 앤서니 홀든의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경우 아예 “뛰어난 셰익스피어 전기는 애당초 있을 수 없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셰익스피어의 명성을 생각해 보면 그에 대한 기록이 이토록 드물다는 것 자체가 무척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셰익스피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학파를 형성할 정도임에도 말이다.
수수께끼 같은 삶
우리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대략 이렇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16세기 중반, 영국 잉글랜드의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어 폰-에이번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1950년경 고향을 떠나 런던에서 배우와 극작가로 활동했다.
또한 셰익스피어는 1616년 사망하기까지 총 37편의 희곡과 154편의 시를 남겼는데 시의 경우 생전에 발표한 두 편 외에는 모두 사후에 책으로 공개됐다. 그는 귀족 집안의 자제도 아니었으며 대학교육을 받지도 못했지만 그런 사람들을 능가하는 탁월한 언어 구사력과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력을 바탕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 문장가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것뿐이다. 그 이상은 명확한 게 별로 없다. 특히 사생활은 그야말로 신비로운 수준이다. 심지어 생년월일조차 명확하지 않다. 포털사이트 등에는 1564년 4월 26일 태어나 1616년 4월 23일 숨진 것으로 표시돼 있지만 1564년 4월 26일은 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유아 세례를 받은 날일 뿐이 다. 그래서 사망 시의 나이도 이에 근거해 대략 50~60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 역시 밝혀진 바가 없다. 다행스럽게 동시대의 극작가 로버트 그린이 1592년 동료에게 보낸 서한에서 셰익스피어를 언급한 기록이 있어 이때쯤에는 이미 그가 런던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극작가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참고로 로버트 그린은 서한에서 셰익스피어에 대해 “학식 낮은 촌뜨기가 벼락출세를 하 더니 누구 못지않게 잘 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했다.
어쨌든 이를 단서로 학자들은 극작가로서 셰익스피어의 활동기를 대략 1590년부터 1610년까지로 추정한다. 물론 이 시기 동안 구체적으로 그가 무슨 활동을, 어떻게 펼쳤는지는 알지 못한다.
또 셰익스피어는 말년에 상류계급인 ‘신사(gentleman)’로 인정받을 만큼 저명인사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그즈음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왜 은퇴를 결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사인(死因)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결국 고향땅에서 생을 마감한 셰익 스피어의 시신은 마을 내 홀리트리니티 교회에 안장됐다. 여기서 한 가지 눈 여겨 볼 점은 그의 묘비에 적힌 글귀다.
‘여기 덮인 흙을 파헤치지 마시오. 이 무덤의 돌을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는 축복이, 나의 뼈를 움직이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리.”
이는 셰익스피어가 직접 쓴 글로 알려져 있지만 역시 확증은 없다. 다만 무덤을 건드리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에 얽힌 비밀들과 무관하다고 여길 수 없는 대목임에는 틀림없다.
이와 관련 지난 2008년 홀리트리니티 교회는 셰익스피어 무덤을 보수해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교회 측은 위와 같은 경고를 무릅쓰고 무덤을 손보는 일에 상당한 심리적 부담이 따랐지만 400여년간 사람들의 통행으로 훼손된 무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무덤 속까지 파헤치지 않아서인지 다행히 지금까지 별다른 저주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오늘날의 수많은 셰익스피어 전기(傳記)는 5%의 사실과 95%의 억측으로 이뤄진 것일지도 모른다.
가짜와 진짜
작품 외에는 온통 베일 투성이인 셰익스피어의 종적을 보면 그의 실체를 의심하는 것도 그리 무리가 아니다. 가장 극단적인 것으로 셰익스피어 자체가 허구의 존재며 그가 썼다고 알려진 작품들은 모두 다른 누군가의 장착물이라는 주장이 있다.
유명인에게 뒤따르는 가십이라 치부하기에도 도가 지나친 수준이지만 그 흔한 친필 원고조차 단 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고 유언에서도 자신의 작품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구심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아울러 앞서 언급했듯 작품의 완성도와 사적인 환경이 극히 상반된다는 사실도 의심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방대한 지식과 상당수의 어휘가 사용됐지만 당시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고향에는 별달리 읽을 만한 서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학교에 해당하는 그래머스쿨 (Grammar School)을 졸업했을 뿐 제대로 된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부모와 아내, 자식 등 온 가족이 모두 문맹이었다고 한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
셰익스피어가 허구의 인물이라는 논란은 최근에 불거진 것도 아니다. 그 동안 많은 학자들이 문학 천재인 셰익스피어가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일 리 없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일찍이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의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는 소설가 찰스 디킨스도 그의 진위 여부를 밝혀내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최근에는 영국 내 유명 인사 287명이 공식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가 정말 허구의 인물이라면 그의 이름으로 희대의 걸작을 남긴 진짜 셰익스피어는 도대체 누구일까. 현재 여러 명의 후보가 거론되고 있는데 그중 3~4명에게 많은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가장 유력한 이로는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꼽힌다. 당시 그 정도의 문장력을 구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사실상 16세기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베이컨이 유일했다는 판단에서다.
사실 베이컨은 희곡을 써서 출세를 했고, 돈도 모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적으로 상류사회 인사의 희곡 집필은 명예롭지 못하며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다.
베이컨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국회의원, 제임스 1세 치하에서 법무장관을 위시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자작(viscount)의 작위까지 얻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자신을 감추고 셰익스피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웠다는 것. 공교롭게도 셰익스피어가 낙향한 시기도 베이컨이 법무장관에 취임하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다른 사람으로는 극작가 겸 시인인 크리스토퍼 말로가 언급된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연극계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그에게는 사뭇 특이한 이력이 있다. 장학금으로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그는 재학 중 영국 첩보기관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진보적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신을 부정하는 논문을 썼다가 체포령이 내려지는 등 29년의 짧은 생애 동안 파문이 줄을 이었다. 마지막도 극적이다. 그는 주점에서의 사소한 술값 다툼 끝에 동료의 칼에 찔려 숨졌다.
말로를 셰익스피어로 믿는 사람들은 그의 삶의 궤적과 연관된 해석을 제기한다. 어떤 심각한 위기에 처한 말로가 죽음을 위장해 정체를 숨기고 셰익스피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썼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가 정말 허구의 인물이라면 그의 이름으로 희대의 걸작을 남긴 진짜 셰익스피어는 도대체 누구일까.
오랫동안 셰익스피어의 실제 모습으로 알려졌던 '플라워 초상화'. 몇 년 전 영국학자들에 의해 가짜임이 밝혀졌다.
셰익스피어의 얼굴도 가짜다?
항간에는 옥스퍼드 가문의 17대 백작 에드워드 드 비어가 진짜 셰익스피어라는 주장도 흘러나오고 있다. 그는 귀족 집안 출신답게 폭넓은 교육과 지식을 바탕으로 글을 썼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제3의 필명을 필요로 했다는 것.
이 가설의 지지자들은 셰익스피어라는 필명이 옥스퍼드 가문 문장(紋 章), 즉 부러진 창을 휘두르고 있는 사자 모습에서 유래됐다고 여긴다. 흔들다(Shake)와 창(Spear)이 합쳐져 셰익스피어가 됐다는 얘기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미국의 극작가 폴 스트라이츠는 저서 ‘옥스퍼드: 엘리자베스 1세의 아들’에서 셰익스피어가 에드워드 드 비어 백작이며 엘리자베스 1세의 사생아라는 주장을 펼쳤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여왕이 사실은 여러 명의 사생아를 낳았으며 그 첫 째인 셰익스피어를 16대 백작인 존 드 비어 부부에게 맡겨 에드워드 드 비어로 양육했다는 것이다. 스트라이츠는 셰익스피어 자신도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햄릿’ 등의 작품에 그런 내용을 반영했다고 설명한다.
이 밖에도 셰익스피어의 실체라며 거론되는 인물은 어림잡아 30~40명이 넘는다. 학계에서는 시대상을 고려해 셰익스피어가 한 명의 개인이 아닌 여러 명으로 구성된 조직이었을 것이 라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한다. 당시에는 공동 창작이 워낙 빈번한 일이었다는 이유에서다.
더구나 셰익스피어가 활동할 무렵 옥스퍼드대학과 캠브리지 대학의 지식인들 중에는 몰래 연극에 참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중 몇몇이 사회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셰익스피어라는 이름 뒤에 숨었을 개연성을 배재할 수 없다고 해석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희곡 ‘햄릿’의 한장면. 셰익스피어는 이외에도 ‘로미오와 줄리엣’, ‘베니스의 상인’, ‘맥 베스’ 등 무수한 걸작을 남겼다.
한편 일각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비밀을 그의 초상화에서 찾기도 한다. 여러 점의 셰익스피어 초상화 가운데 ‘플라워 초상화’는 얼굴 부위에 묘한 음영이 드리워져 있다. 얼핏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에 대해 호사가들은 그림 속 인물이 셰익스피어라는 가면을 쓰고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 이렇게 그려졌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로 여겨졌던 플라워 초상화는 몇 년 전 가짜임이 밝혀졌다. 영국의 초상화 전문가들이 그림 속에서 1814년경의 안료인 황연(黃鉛) 성분을 확인하고, 셰익스피어의 사후 200여년 뒤에 그려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전문가들은 왼쪽 귀에 황금 귀걸이를 건 모습의 ‘찬도스 초상화’가 실제 셰익스피어의 모습과 가장 비슷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이 또한 가짜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저주?
셰익스피어의 묘비에는 ‘나의 뼈를 움직이는 자에게 저주가 내릴 것’이라는 경고가 적혀 있다.
과학적 실체 규명
주류 학계의 분석은 어떨까. 이 모든 추정들은 그저 입담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학계는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16세기만 해도 지금처럼 체계적 기록 보존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셰익스피어 뿐만 아니라 당대의 다른 저명인사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셰익스피어 연구가이자 ‘셰익스피어와 마시는 한 잔의 커피’, ‘셰익스피어 그리고 그가 남긴 모든 것’의 저자 스탠리 웰스는 셰익스피어의 진짜 정체를 둘러싼 구구한 주장들이 하나같이 속물 근성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의문의 배경에 시골 출신 극작가가 엄청난 걸작을 탄생시켰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오만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웰스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지만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의문과 비밀들이 그에 관한 세간의 관심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영리한(?) 학자와 작가들은 현재 셰익스피어의 삶에 가까이 접근, 지금껏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례로 2009년 영국의 작가 찰스 니콜은 ‘실버스트리트의 하숙인 셰익스피어’라는 저서에서 셰익스피어가 1600년대 초 런던 실버스트리트에 살았다고 주장하고 그에 관한 법정 공문서 등을 제시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셰익스피어는 한창 작품 활동에 전념하던 시절을 외국인 밀집지역인 한 도시의 뒷골목에서 보낸 것이 된다.
과학계에서도 점차 진화해가는 과학 기술을 통해 셰익스피어의 실체 파악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프랑스, 아프리카 등 이국적 배경이 자주 묘사된 점과 관련해 니콜은 “정작 셰익스피어는 한 번도 영국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며 “이국적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외국인이 가득한 실버스트리트에서 지내며 상상의 여행을 떠났을 뿐”이라고 말했다.
세익스피어에 대한 관심은 단지 문학계에 한정되지 않는다. 과학계에서도 실체 파악에 애를 쓰고 있다. 점차 진화해가는 과학 기술을 역사 연구에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올 6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비트바테르스란트대학의 생물학자 프란시스 새커리 박사팀은 셰익스피어의 사인 규명을 위해 영국 의회에 셰익스피어의 무덤 발굴 신청서를 제출했다. 연구팀은 무덤 발굴 후 셰익스피어의 생전 건강상태를 분석, 정확한 사인을 밝혀냄과 동시에 최첨단 3D 기술을 동원해 생전 모습을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새커리 박사는 10년전 법의학 기술로 셰익스피어의 집 안마당 땅속에 묻혀 있던 24개의 대마초를 발견한 적도 있다. 이에 그는 “셰익스피어는 대마초 흡연자며 그의 천재성은 마리화나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약하자면 지금으로선 셰익스피어에 관해 100% 확실한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그의 실체를 확인해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실 존 인물인지, 가상의 인물인지가 아닐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감동이야말로 셰익스피어의 본질일지 모른다. 먼 훗날 과학기술에 의해 실체가 드러나 그를 둘러싼 미스터리한 베일이 벗겨지더라도 이 점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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