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
- 롤랜드 에머리히
- 출연
- 리스 이반스 (에드워드 데 베레 역),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엘리자베스 여왕 1세 역), 조엘리 리차드슨 (젊은 엘리자베스 여왕 1세 역) 데이빗 튤리스(윌리엄 세실 역) 레이프 스펄(윌리엄 세이스피어 역) 세바스찬 아메스토 (벤 존슨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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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에 대한 또 하나의 이야기. 이번에는 가설들 가운데 비교적 널리 퍼져있던 가설이 주제이다. 셰익스피어는 당시 옥스퍼드 백작이었던 에드워드 드 비어(Edward de Vere)라는 것. 영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가설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을 터라 그 자체만으로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영화를 통해 그 가설이 현실화 되는 과정을 지켜 보는 것은 흥미롭다. 더불어 공인될 수 없었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들을 둘러싼 당대 절대 왕정의 정치적 역학 관계와 그 속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와 존재를 만들어가고 유지하거나 혹은 상실하는 주체들의 이야기가 리얼하게 전개된다.
- 이야기의 큰 얼개는 셰익스피어가 에드워드 드 비어의 이름, 작품과 명예를 제것으로 탈취하는 과정이겠으나 그것만이 이 영화의 틀만은 아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두 아들, 그 아들들의 관계, 그들을 이용한 세실가의 대를 이은 정권의 장악, 당시 영국 극장의 리얼한 묘사, 관련된 극작가들의 흥미로운 모습, 특히 에드워드 드 비어의 작품이 (극중에서) 도대체 가망없는 삼류 배우인 셰익스피어의 것으로 전유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과정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벤 존슨의 갈등 등 이 영화는 영문학을 전공하거나 관심을 가진 이라면 보면서 흥미와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구성을 하고 있다.
- 이야기는 극중극 형식으로, 극의 네레이터를 통해 셰익스피어(즉, 에드워드 드 비어)의 육필 원고--나중에 The First Folio가 되는--를 지키려는 벤 존슨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젊은 시절 에드워드 드 비어는 귀족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발표할 수 없었던 극과 시를 쓰는 한량. 그는 엘리자베스 궁의 최고 권력자 윌리엄 세실경의 사위다--드 비어는 실제로 세실경의 장녀와 혼인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자신이 글을 쓰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애정없는 결혼 생활을 하는 세실경의 딸, 즉 자신의 아내에게는 관심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반한 엘리자베스 여왕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 관계는 사실 근친상간. 에드워드 드 비어는 다름아닌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들이었던 것--물론 이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설정이다. 에드워드는 이 사실을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된다. 이 비밀을 알고 있었던 이는 다름 아닌 윌리엄 세실과 세실 경의의 아들. 윌리엄 세실은 에드워드를 자신의 사위로 삼아 딸과의 사이에서 손자를 얻어 나중에 (공식적으로는) 처녀왕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 후 에드워드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왕권이 자신의 가문에서 이어지게 하려는 것. 그러나 드 비어와 딸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고 오히려 엘리자베스 여왕과 드 비어의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물론 이 또한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 아이를 낳기 위해 갑자기 궁을 비우고 떠난 여왕을 오해한 드 비어는 세실 경의 협박과 충고에 따라 궁밖으로 나온 후 더욱 자신의 글에 몰두한다.
- 한편,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성장하던 극장에 대한 정권의 반감이 거세지며 왕권에 대한 위협의 장소이자 모반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극장을 억압하기 시작하는 귀족세력의 주장 앞에 위기에 처한 극장. 하지만 드 비어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극과 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안다. 그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극과 극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힘을 통해 직접 여왕에게 호소하기 위해 자신이 쓴 극을 벤 존슨을 통해 전달해 익명으로 상영토록한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계속 익명으로 상영된 드 비어의 극은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며 연극과 극장을 다시 살리고 런던 사람들을 극장으로 모이게 한다, 여전히 익명으로. 한 극의 공연이 끝난 어느 날, 사람들은 배우가 아닌 극의 작가를 보기를 원하는데, 드 비어는 자신이 나설 수 없었고, 벤 존슨은 비밀을 약속한 상태. 그때 무대 뒤에서 극의 작가라며 등장한 인물이 연극배우이자 극작가였던 셰익스피어. 에드워드 드 비어가 셰익스피어가, 혹은 셰익스피어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후로 드 비어에게서 벤 존슨을 통해 전달된 작품들은 셰익스피어의 이름으로 공연되고, 그 비밀을 아는 유일한 인물인 드 비어와 벤 존슨은 침묵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이 되면서 이 과정에 얽힌 정치적 문제, 엘리자베스와 드 비어의 근친 상간의 문제, 정치적 알레고리, 외디푸스 콤플렉스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담은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 복잡한 얼개에 비해서는 굉장한 흡인력을 지니고 박진감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와 아카데미 의상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당대의 복장과 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 무대를 둘러싼 연극 안팎 공간의 세밀한 묘사, 곳곳에서 등장하는 익숙한 이름의 극작가들은 영화를 보는 재미를 크게 해준다. 셰익스피어를 책에서 본 사람들이라면 영화속에 묘사된 셰익스피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셰익스피어는 경솔하고 경박하며 간교하게 그려진다. 개인적으로는 벤 존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The First Folio를 출간하면서 최초의 계관시인이 되어 있던 그가 셰익스피어에게 바친 놀라운 찬사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대로 본다면-- 시기심이 아니라 진정한 존경심에서 나온 것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팩션(Faction)은 픽션보다 진중하고 논픽션보다 풍부한 상상력을 준다. 음모론이라고 일컬어지는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여러 이론들 가운데 그동안 가장 널리 알려진 에드워드 드 비어라는 인물이 셰익스피어라는 주장을 믿건 믿지 않건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한 재미를 준다. 이 영화와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함께 보고 버지니아 펠로스가 쓴 또다른 셰익스피어 이야기, [셰익스피어는 없다]를 읽은 다음, 알란 포제너가 쓴 간략한 인물사 [셰익스피어]를 보고 나면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이야기로 글로 전해 들은 역사란 때로 얼마나 숭숭 구멍 뚫린 것인가 하는 생각을 잠깐은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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