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on everything

김훈, [내 젊은 날의 숲](2)

그림자세상 2010. 11. 29. 16:27

"문득 달려드는 생각들은 마음의 깊은 곳을 때린다." (159)

 

"멀리서 보아도, 꽃은 그 꽃을 쳐다보는 사람을 향해서 피어 있다." (194)

 

"꽃잎이 벌어질 때 '퐁' 소리가 났다. ...아무런 기척이 없는 적막 속에서 도라지 꽃봉오리들은 퐁, 퐁, 퐁 열렸다." (196)

 

"마음의 일은 난데없다. 마음의 일은 정처없어서, 마음 안에서는 이 마음이 저 마음을 찌른다." (198)

 

"마음의 일은 때로 몽매하다. 그 몽매한 마음을 더 펼쳐 보인다면, 산맥에 흩어진 백골들 중에서 한 점 백골의 단면을 그리는 일과 억만 년을 피고 지는 무수한 꽃들 중에서, 한 떨기 꽃의 개별적 생명의 현재성을 그리는 일과, 젖니 빠진 신우의 그림을 지도하는 일은 결국 같거나,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한 줄로 엮여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의 일은 결국 몽매하다." (207)

 

"노부부는 아주 오래 살아서, 지나간 삶의 그림자처럼 얇고 가벼웠다." (212)

 

"그의 눈은 세상을 내다보는 기관이라기보다는, 그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는 창문처럼 보였다." (229)

 

"미안허다, 괜찮다. 그 두 마디를 주고받기 위해서, 나는 수목원에서 서울까지 아버지를 보러 온 것이었다. 잎 진 겨울의 자등령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와도 같아, 스산하고 공허하고, 그래서 아무런 의미도 실려 있지 않은 그 두 마디에 아버지의 생애의 모든 무게가 실려 있어서, 그렇게도 입밖으로 꺼내서 발음하기가 어려웠나보다." (259)

 

"나무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타자로서 땅 위에 서 있는데, 사람이 한사코 나무를 들여다본다." (263)

 

"가을에는 숲의 힘이 물러선 자리를 빛들이 차지한다. 잎이 떨어져서 나무와 나무 사이가 멀어진 공간에 빛이 고이고 빛들은 시간에 실려서 흘러가는데, 빛에 시간이 묻지 않는 것 처럼 시간에도 빛이 묻지 않았다. 봄에, 나무는 새잎을 내밀어서 스스로가 빛을 뿜어내는데, 가을에 나무는 잎을 떨군 자리에 빛을 불러들인다.....나무들은 각자 따로 살아서 숲을 이룬다는 것을, 가을의 서어나무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숲은 나무와 잎으로 가득 차서 서걱이지만 숲에는 피의 인연이 없다. 가을에, 나는 그걸 알았다." (264~265)

 

"죽음은 존재의 하중을 더이상 버티어낼 수 없는 생명현상이라는 것을 수목원에 와서 알게 되었다." (267)

 

"죽은 자는 자신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할 것이고 죽은 자가 남긴 한 토막의 백골조차도 살아남은 살마의 마음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므로 죽은 자의 슬픔이나 고통보다는 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더 클 것이고, 살아남은 자가 더 가엾을 것이다."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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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생명의 기원을 말하지 않은 것은 과학적 허영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산천과 농경지와 포구의 생선시장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창조나 진화는 한가한 사람들의 가설일 터이다.

 

구름이 산맥을 덮으면 비가 오듯이, 날이 저물면 노을이 지듯이, 생명이 저절로 태어나서 비에 젖고 바람에 쓸려갔는데, 그처럼 덧없는 것들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눈물겨웠다.

 

돌이켜보니, 나는 단 한 번도 '사랑'이나 '희망' 같은 단어들을 써본 적이 없다. 중생의 말로 '사랑'이라고 쓸 때, 그 두 글자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부재와 결핍을 드러내는 꼴이 될 것 같아서 겁 많은 나는 저어했던 모양이다.

 

그러하되, 다시 돌이켜보면, 그토록 덧없는 걸들이 이 무인지경의 적막강산에 한 뼘의 근거지를 만들고 은신처를 파기위해서는 사랑을 거듭 말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사랑이야말로 이 덧없는 것들의 중대사업이 아닐 것인가.

 

산천을 떠돌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산천은 나의 질문을 나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래서 나의 글들은 세상으로부터 되돌아온 내 질문의 기록이다. 여생의 시간들이, 사랑과 희망이 말하여지는 날들이기를 나는 갈구한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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