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산을 떠났나, 산이 떠났나

그림자세상 2011. 1. 13. 01:05

시인 조용미의 시를 읽다가 가슴에 와닿은 한 구절이 입에 익었다. 바로 이 대목.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걸어본 자는 알 수 있다

숲의 밖으로 난 길이 사람을 다시

산속으로 이끈다는 것을

 

 

산길에 사람이 없다. 숲 밖의 사람소리 들린다. 산책자는 숲 밖을 기찰하다 다시 산속으로 들어온다. 그가 사람과 어울리기를 마다한 걸까. 산이 그를 붙들어두려는 걸까. 산이 세속을 떠나고 세속이 산을 떠난 것이 맞을진대 그는 고독을 자청한 자가 분명하다. 하나, 걸어보라 산책자여. 속리산俗離山은 없고 산리속山離俗만 마주할 뿐이다.

 

 

세속에 거하되 속리의 기운이 충만한 지경은 정녕 없는 것일까. 나는 조선시대 한 화가의 그림을 보며 아쉬움을 달랜다. 18세기 문인화가 이인상은 오직 거속去俗이란 한마음으로 붓 방망이질을 한 사람이다. 오백 년 조선사를 거슬러도 겸재 정선을 넘을 산수화가가 없고, 단원 김홍도를 제칠 풍속화가가 없다는데 이인상은 그 둘과 겨루지 않고 문인화의 최고봉에 버티고 앉은 화가다. 그의 우뚝한 좌정에 관해서는 미술사가들 사이에 다툼이 없다.

 

 

이인상이 남긴 가로 일 미커가 넘는 장폭의 그림 <장백산>을 보자. 한눈에 봐도 정치한 기색이 없어 무성의한 느낌이 든다. 퀭하고 휑하니 핍진하다기보다 소루하고, 채웠다기보다 비운 그림이다. 가까이 보이는 두 산봉우리에 몇 그루 나무를 그려넣었으나 울창하지 않다. 오른쪽 중턱에 반쯤 모습을 드러낸 정자가 보이지만, 저 뒤편에 물러나 있는 산들은 무심할 정도로 어렴풋하다. 인적이라곤 찾을 수 없고, 켜켜이 내려앉은 시간이 적막과 공소가 지배하는 공간을 쓰다듬고 있다. 화가는 무슨 심회로 외마디 소식조차 없는 그리을 그렸을까.

 

 

그림 왼쪽 아래에 어련무던한 글씨가 보인다. 번역해 보면 그린 까닭이 읽힌다. "가을 비 내리는 날, 계윤의 집에 갔다. 그가 종이를 내놓으며 그림을 그려달라고 한다. 언득 곽충서가 종이연을 그린 일이 생각났다. 계윤이 내가 너무 나태하다고 말한다. 장백산을 그리고 붓을 놓은 뒤 함께 웃었다." 앞뒤 사연을 챙겨봐야 제발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계윤은 이인상의 친구로 당대 명필인 감상숙의 자다. 이인상이 그의 집에 놀러갔다가 이 그림을 그렸다. '곽충서의 종이연이 생각난다'는 무슨 뜻인가. 곽충서郭忠恕는 송나라 화가다. 그의 자는 '국보국보'다. 행실로 보면 아닌 게 아니라 국보감이다. 곽충서는 국자감 주부를 제수 받았지만 술에 취해 조정에서 쟁론을 벌이다 눈 밖에 났다. 말이 방자하다는 이유로 등주로 유배되었고 풀려나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성품이 매이기를 싫어했지만 세속을 등지지도 않았다. 술을 좋아하고 교유가 활달했다. 세인들은 "세상 밖에서 익은 음식이라곤 먹지 않은 사람 같아서 또 하나의 골상을 갖추었다"고 평가했다.

 

곽충서의 매이지 않는 삶은 조선 문인 허균의 글에도 나온다. 허균은 세 가지 고질병에 시달린 고집쟁이다. 하나는 권세가의 집을 드나들면 발꿈치가 부르트는 병이고, 또 하나는 귀족에게 절하면 허리가 뻣뻣해지는 병이고, 마지막 하나는 남을 칭찬하면 어느새 말을 더듬는 병이다. 귀천 안 가리고 시정잡배를 만나 술잔 기울이는 것을 본 친구가 허균을 나무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곽충서는 시장통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면서 나와 함께 지내는 사람은 모두 이런 부류다'라고 했는데, 형께서 함께 노니는 사람들은 시장 사람보다 나은가."

 

곽충서 역시 흥이 일면 예의범절에 구애받지 않았고,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돌아가기를 잊었다. 그는 그림 주문을 자주 받았다. 어느 날 부자가 향응을 베푼 뒤 비단꾸러미를 펼치며 그림을 그려달라고 떼를 썼다. 그는 마지못해 붓을 들었다. 어린아이가 연을 날리는 그림인데 왼쪽 아래에 아이를, 오른쪽 위에 종이연 하나를 달랑 그렸을 뿐이었다. 텅 빈 곳에는 아이와 연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실만 그려넣었다. 곽충서는 비단 가득 그려진 그림을 기대한 부자를 놀린 꼴이다. 이인상도 <장백산>을 완성해 놓고 보니 여백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곽충서의 일화를 떠올렸다. 장백산은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지만 제발의 행간을 따져보면 '빈(白) 곳이 너무 많다(長)'는 뜻이겠다. '이인상이 나태하다'라는 지적은 그림을 다 채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장백산>이 그려진 사연은 그렇다 치고, 솜씨나 품격은 어떠한가. 치밀하지 못해 나무와 바위를 그린 붓질은 어설프다. 세련된 기량과 거리가 멀다. 담담하면서 무덤덤하고 모자라는 듯 하면서 칼칼한 느낌이 풍긴다. 담담한 것은 먹을 진하게 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뭇잎이나 바위 군데군데 진한 먹을 찍었지만 아주 옅은 먹으로 쓱쓱 그은 흔적이 더 많다. 칼칼하다는 느낌도 먹을 진하게 쓰지 않은 데서 온다. 농익은 표현을 자랑하는 그림은 문인화가의 몫이 아니다. 문인화는 기술을 뽐내지 않는다. 일부러 못 그린 듯하면서 가슴속의 일취와 사유의 깊이를 드러낸다. 품격이 거기서 우러나온다.

 

이인상은 꼬장꼬장한 선비였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세상의 시시비비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 풍모가 눈에 들어온다. 수척한 골상에 눈빛은 내리깔고 있으며 꽉 다문 입에 눈두덩은 깊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다. 서른이 넘어 집 한 채를 가질 수 있었는데, 그것도 친구들이 겨우 마련해 준 초가였다. 문설주가 낮아 드나들 때 머리를 숙여야 했지만 이 집에 이름 붙이기를 '능호지관凌壺之觀'이라고 했다. '삼신산 중에 하나인 방호산을 능가하는 경관'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인상의 호가 '능호관'이다.

 

다시 한 번 <장백산>을 보자. 후세 역사가들은 말했다. "능호관의 그림을 대하면 이마에 일진광풍이 스쳐 지나가고, 맑고 스산한 문기가 서려 마음이 조촐해진다." 이인상의 올곧은 심상과 군더더기 없는 처신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 그림의 겉이 아닌 속을 본 사람이라 하겠다.

 

그렇다 해도 저 비어 있는 속수무책의 공간은 어쩔 셈인가. 유정함이라곤 한 치도 없는 외진 막막함. 여백은 격절이다. 한 소식조차 들을 수 없는 저 여백에서 나는 목마른 정적과 맹렬한 적멸을 느낀다. 세상이 그림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도 그림은 세상에서 나왔을 터인데, 이인상이 그린 <장백산>은 어느 세상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도린결인가. 설령 <장백산>을 걸어간들 속세가 궁금한 나는 한쪽 귀를 세울 수밖에 없으리니. 속리산이여, 어이 그리 멀기만 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