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쪽빛 바다에 떠도는 한 조각 붉은 마음(2)

그림자세상 2011. 6. 4. 14:17

불러주는 이의 꽃, 쪽빛

 

그러나 바다의 색은 중구난방이다. 에메랄드이건 코발트블루이건 울트라마린이건 바다는 정작 색의 명명을 개의치 않는다. 이 딸의 예술인이 가장 즐겨 일컫는 바다색은 쪽빛이다. 쪽빛은 하늘색이기도 하다. 통영의 하늘과 바다는 쪽빛, 그 알 듯 모를 듯한 색의 웅숭깊음으로 예술가를 번민하게 한다. 쪽빛으로 물들인 모시를 보고 타관의 소설가 조정래가 이렇게 썼다. "가슴을 찌르르 울리는 전율과 함께 무언가 깊게 사무치는 감정을 일으키는 그 쪽빛을 무어라 해야 할까. 그건 깊고 깊은 바다에서 금방 건져올린 색깔이었고, 차고 시려서 더욱 깊고 푸르른 겨울 하늘을 그대로 오려낸 것이었다. 그 쪽빛 모시필은 찬바람이 펄럭이고 나부끼며 겨울 하늘로 변해가는가 하면, 바라볼수록 처연하고 한스러운 감정에 사무치게 하는 것이었다."

 

소설가는 쪽빛을 하늘과 바다의 색에 견준다. 소설가의 느낌은 그러나 어지럽다. 그의 글은 영탄조다. 쪽빛을 어떻게 이름 지어야 할지 애태우는 모습으로 글을 시작한다. 결론은 바다와 하늘에게 이름 짓기를 미룬다. 쪽빛이 가슴에 남긴 흔적을 소설가는 '처연함과 한스러움'으로 표현했다. 처연하고 한스러우면 슬퍼진다. 쪽빛의 느낌을 규정하지 못한 채 붓을 거두는 문인의 저주가 안타깝다.

 

일찍이 김춘수는 <꽃>이라는 시에서 이름 부르기의 갈망과 이름 짓기의 어려움을 한꺼번에 토했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무엇은 이름이 그립다. '무엇'이 '꽃'이 되고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몸짓'이 되려면 이름을 얻어야 한다. 그는 불러주기를 고대하는 안타까움을 다음과 같이 맺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쪽색을 만드는 전통 염장에게 물어도 답은 시원치 않다. 내가 아는 염장은 쪽색을 '청도 아니요, 벽도 아니요, 남도 아닌 까마득한 색'이라고 설명한다. 까마득하다니, 이야말로 바다도 아니요, 하늘도 아니요, 꿈결도 아니요, 그렇다고 슬픔이나 처연함이나 한스러움도 아닌, 오리무중이란 말 아닌가. 실로 언도단이자 어불성설이 쪽색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다. 천하의 문인들도 쩔쩔맨 이름 짓기를, 그 색을 만들어내는 염장조차 까마득하다고 말한 쪽색의 정체를,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 규정하겠는가. 쪽색은 수식을 도로에 그치게 만드는 냉혹한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쪽빛의 스펙트럼은 넓다. 뉘앙스는 천차만별이다. 서양의 먼셀 표색계가 무색할 정도로 능준하다. 비유를 허용한다면 그 쪽빛의 스펙트럼은 청산리 벽계수에서 비갠 날의 가을 하늘, 흐린 날의 만경창파, 갓 시집온 새아씨의 옥반지, 초가을 햇빛에 빛나는 청자 비색 등으로 천변만화할 것이다. 통영에서 본 쪽색은 제승당으로 가는 바다 길목에서 가장 짙푸르렀다. 꿈엔들 잊지 못할 그 쪽색은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한 생애를 다 바쳐 빛난다. 푸른색은 모든 인류가 좋아하는 색이다. 미국의 색채 전문가인 파버 비렌Faber Birren은 각국에서 행해진 조사결과를 모아 평균하여 사람들은 파랑, 빨강, 초록, 보라, 주황, 노랑 순으로 색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순서는 성별, 국적, 인종을 불문하고 거의 일치한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엔젤레스캠퍼스UCLA에 제출한 로버트 제랄드Robert Gerald의 박사학위 논문은 푸른 빛깔의 정신생리학적 효능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쪽빛을 포함한 푸른 계통의 색은 어느 것이나 치유 효과가 높다는 것이다. 이 색깔은 긴장상태를 완화한다. 곧 완화진정제인 셈이다. 혈압을 내려 고혈압을 치료하는가 하면 근육경련이나 사경, 손떨림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준다. 눈이 쓰릴 때도 좋다. 어두침침한 푸른 조명은 불면증 환자에게 잠을 유도한다. 고통을 더는 데도 푸른색 계통은 진정작용을 한다. 이쯤 되면 푸른색은 만병통치다. 통영의 쪽빛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람들을 위로한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바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하늘이 바로 쪽빛 아닌가. 통영의 쪽빛은 자연에 안기고픈 모든 이의 염원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