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이 부른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을 보여준다. 살점을 파고드는 추위와 간장을 끊어내는 참언이 뒤섞여 남한산성으 사힙칠 일은 현생의 지옥도와 다름 없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참상은 청나라에 투항하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더한 치욕은 삼전도비 수립의 날을 기다려야했다. 이 '대청황제공덕비'에 연루된 비운의 주인공은 [남한산성]에 등장하지 않는다. 출성이 소설의 종장이다.
삼전도비에 얽혀든 인물은 오준이다. 그는 비문 글씨를 썼다. 김훈은 [남한산성]이 발간된 뒤 [남한산성, 또 하나의 이야기]라는 해설집을 냈다. 이 책에서 김훈은 오준의 됨됨이를 언급한다. 오준의 당대의 명필로 꼽힌다. 병자호란 뒤에 외교사절로 여러 번 심양을 다녀왔다. 와희지체에 속하는 단아한 필체를 구사했으며 수많은 비석의 글씨를 후세에 남겼다. 충남 아산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비의 글을 썼고, 삼전도비석의 글씨도 썼다. [근역서화징]에는 "오준이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도 능해서 삼전도비의 글씨를 썼으나 그로 인해 한을 품고 죽었다"라고 적혀 있다.
오준은 인조와 효종 대를 통틀어 최고의 명필이다. 병자호란 이후 한성부판윤과 예조판서를 지낸 그는 삼전도비문을 씀으로써 비운의 문사가 된다. 비문의 글을 지은 이경석과 글씨를 쓴 오준은 삼전도비 수립에 참여한 악연으로 평생 공박에 시달렸다. [남한산성]에서 오준의 이야기는 빠졌다. 하지만 소설을 꼼꼼히 읽은 독자는 삼전도비에 관한 단초를 발견했을지 모른다. 잠시 소설을 돌이켜보라.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정오품 교리와 정랑, 정육품 수찬 등이 최명길과 함께 인조의 침소에 불려온 장면이 나온다. 인조는 그들에게 칸에게 보낼 답서를 쓰라고 명한다. 최명길을 제외한 세 명의 당하관들은 청천벽력 같은 명을 받고 전전반측한다. 이 대목이 삼전도비와 관계가 있다.
김훈은 당하관 세 명의 고민을 형상화하면서 삼전도비문을 지을 뒷날의 상황을 교묘히 끌어온다. 실록에 보면, 비문을 쓰게 된 조선 조정의 굴욕이 자세하다. 이경석, 장유, 조희일, 이경전 등이 비문을 지을 인물로 지목되었는데, 이경전은 병을 핑계로 모면하고 조희일은 일부러 조잡한 글을 올렸다. 인조는 장유와 이경석의 글을 청나라에 보내 심사를 받았고, 청은 자구를 고치라는 훈수를 단 채 이경석의 글을 낙점한다. 이들의 좌고우면하는 처지가 [남한산성]에서 답서 쓰는 장면으로 바뀌어 있다.
이경석은 자신의 글이 간택되자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하며 울부짖었다. 오준은 어떠했는가. 그는 비문에 새길 글씨를 쓰고 나고 한강에 나가 돌로 자신의 오른손을 찧었다는 야사를 남긴다.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는 다른 소설에도 나온다. 언론 출신인 김용우의 중편 [비명]은 광주할쟁의 잔영과 삼전도비의 비극을 교차 편집한 소설로 이경석과 오준의 절망이 그려져 있다. 글 배운 자의 운명이 이토록 얄궂고 처절하다.
한석봉은 송설체를 쓰다가 왕희지체로 옮긴 전력이 있다. 왕희지를 닮고자 한 오준은 석봉을 따른다. 오준의 간찰은 노련한 초서체다. 윗사람의 편지를 받고 답을 한 내용인데 좀이 슨 시전지가 오히려 예닯다. 윗사람이 초완을 보내라고 했던 모양이다. 초완은 돗자리나 발을 짜는 데 쓰는 풀이다. "병이 날로 깊어갑니다. 늙고 게을러 기동조차 못합니다. 초완을 구하려는 사람은 구름 같은데, 백 척의 배에 싣고 와도 다 들어줄 수 없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쓱쓱 써내려간 글씨지만 자획의 변화가 공교롭다. 골기가 살아있으면서 유려한 필체다. 속도감이 넘치고 거침없는 운필이 돋보인다.
오준의 인생살이를 좀 더 캐보면 어찌 이토록 기구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준이 충무공의 비문을 쓴 것은 이미 김훈이 말했다. 성웅을 기리는 비문이라 최고의 서예가가 쓰는 것이 마땅했다. 그랬던 그가 '대청황제공덕비'를 썼다. 오랑캐의 공덕을 정성스레 써야 했던 오준의 심사는 되묻는 게 잔인하다. 돌로 손을 짓찧었다는 후일담이 거짓이 아닐 성싶다. 그것이 끝이었다면 다행이다. 그는 억장이 무너지는 일을 거푸 당한다. 사연은 이렇다. 일본의 에도막부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이 닛코 산 토쇼궁에 남아 있다. 1642년 일본이 조선에 요청하기를, 사당에 비치할 편액과 시문과 종을 보내라고 했다. 이 종의 명문을 또 오준이 맡았다. 일본은 사신을 통해 예를 갖추었지만 속내는 오만했다. 명문 내용에 간섭하는 무례를 저질렀고, 도쿠가와의 업적을 칭송하는 글 또한 조선의 자존심을 긁었다.
도쿠가와의 손자인 이에미스가 죽자 일본은 닛코 산에 대유원묘를 만들어 그를 안치한 후 다시 조선 조정에 손을 벌렸다. 이번에는 등롱을 요구했다. 거기에 또 단서가 붙었다. 즉 '대유원'을 쓸 때 글자 하나를 높여서 써달라고 했다. 문장에서 줄을 바꾸어 한 자를 높여 쓰거나 떼어서 쓸 때는 그 대상을 존경하는 뜻이 담긴다. 일본은 자국이 존경하는 인물을 조선도 존경해야 한다며 패륜을 자행했다. 이 등롱의 명문 역시 오준이 썼다. 그저 기구하다는 말로 오준의 삶을 요약하기에는 미진하다. 조선의 영웅을 떠받든 붓으로 오랑캐의 수괴를 찬양하고 왜국의 장수와 그의 손자까지 칭송하고 나섰으니 붓이 천 자루면 무엇 할 것이며, 문자 속이 깊은들 그의 포한에 닿을까.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란 말은 이럴 때 쓰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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