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바뀌면서 '이것 참 대단하구나' 싶은 귀한 책을 얻었다. 세 권이 한 질로 구성된 이 서권은 부피가 두툼하거니와 제목이 고풍스러워 읽기도 전에 겨울날 화톳불 곁에 앉은 느낌을 준다. 제목은 [한국문방제우시문보 韓國文傍諸友詩文譜]이고, 편저자는 서예가이자 문인화가로 한묵의 장에서 탐구력이 왕성하기로 소문난 일사 구자무 선생이다.
국전 2회 특선을 기록하고 원곡서예상을 받은 일사 선생은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방함이 익히 알려진 분이다. 문인화의 맥을 올바르게 잇고자 애쓰는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문인화는 때에 전 습기에 머무르지 않을 뿐더러 시대의 정신을 곧추 세우려는 비판적 시각이 돋보인다. 때로는 고담한수의 공교로운 붓놀림으로, 때로는 갓맑은 정취를 구사하는 새뜻한 화면으로 눈 밝은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무엇보다 그는 전고典故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을 진지하게 상고하는 자세로 정평이 나 있다.
'한국문방제우시문보'를 펼쳐보면 흡사 오래된 한지에서 풍기는 습습한 내음과 희부윰한 기색이 피어나오는 듯 하다. 물론 장롱 속에 처박아둔 고서묶음은 아니다. 말쑥하게 장정된 이 책에서 오히려 고취가 먼저 다가옴은 잊힌 옛글들이 깨알처럼 모여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자가 전래된 이후 우리 땅에서 노래한 문방구 예찬을 죄다 수집한 것이라 보면 맞다. 원본을 그대로 영인한 까닭에 한문을 모르는 세대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겠지만 멸실 위기에 놓인 일차적인 자료들이나마 알차게 꾸려보겠다는 편저자의 속 깊은 충정이 책갈피마다 그득하다.
책에 등장하는 문인, 학가, 정치가 등은 모두 합쳐 이백팔십칠 명이다. 별스럽지도 않은 문방구에 무슨 애틋한 정이 있다고 이토록 많은 이가 글을 짓고 남겼을까 하는 의문은 책장을 넘기면서 싹 가신다. 일상의 기물도 손때 묻은 세월이 길어지면 여상한 소재를 넘어선다. 그것에 추억이 쌓이고 사연이 덧붙는다. 그때의 문방구는 무심한 물상이 아니라, 남들 모르는 아낌을 받는 정인처럼 다가온다.
등장인물의 면면을 보자. 신라시대 최치원이 맨 앞머리에 앉아 있고 그 뒤로 고려의 이규보, 이제현, 조선의 강희안, 서거정, 김종직, 김시습, 이언적, 이황, 김인후, 송익필, 허균, 윤선도, 박지원, 정약용, 김정희 등 내로라하는 거봉들이 연맥을 이룬다. 근대 인물로는 오세창, 정인보, 현대 인물로는 이가원 등이 본문을 장식한다. 마치 사서에서 일부러 골라낸듯 쟁쟁한 명사들이 생애에 단 한 수일망정 '문방연가'를 남겼다는 점에서 거기에 담긴 자정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들이 읊은 시문의 형식도 가지가지다. 시詩, 가歌. 송頌, 잠箴, 명銘이 있는가 하면, 찬讚과 부賦가 있다. 제법 호흡이 긴 발跋과 전傳도 섞여 있다. 편수는 놀랍게도 천오백이십이 편이다.
현대를 흔히 컴퓨터 만능시대라고 한다. 산더미 같은 분량의 기록이나 자료의 보관기능을 군소리 없이 해결하는 게 요즘의 인터넷 세상이다. 사무실마다 '필기구 추방'을 목청껏 외쳐대다 보니 연필이나 볼펜은 하루아침에 퇴물 신세로 전락할 지경이다. 하물며 붓이나 벼루, 먹 따위 선인들의 문방구는 아예 기억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지 오래다. 박물관을 흔히 '유물의 무덤'이라고 한다. 옛 문방구가 박물관으로 가듯 오늘의 연필과 볼펜도 박물관에 갈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상기해 보자. '무덤' 앞에서 산 자가 매무새를 가다듬지 않는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잖은가. 꼬박 삼 년간 만사를 제쳐두고 이천 질이 넘는 각종 전적과 씨름했다는 편저자는 바로 이처럼 향수만 남은 채 실체가 까무룩해진 옛것을 되살려 내고자 한 분이다. 그는 유물의 고분을 경건한 학구열로 발굴 조사한 개척자인 셈이다.
편저자는 자서에서 '이 책에 수록된 시문에는 우리 선인들의 사유와 감정과 생활의 아취가 짙게 배어 있다'라고 썼다. 문방생활에서 우러난 문인들의 아려한 서정이 시서화의 근간이 되었다는 말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다. 이 책에 실린 퇴계 이황의 제자 권호문의 시 <연지청와硯池靑蛙>는 그 적실한 예이다.
권호문의 됨됨이는 일찍이 퇴계가 말했다. "유자儒者의 기상이 넘치고, 맑고 깨끗하여 산림지풍山林之風이 있다." 그는 벼슬을 마다하고 경북 안돈 청성산 기슭에 서실을 짓고 물인 양 구름인 양 유적하게 말년을 보냈다. 어느 여름날 그의 서실에 청개구리 한 마리가 겁도 없이 뛰어들었다. 그는 말한다. "서실이 산과 가까워 이따끔 청개구리가 들어와서는 벼룻돌 오목한 연지에 가득 부어놓은 물위에 떠서 노니니 이 또한 좋은 일이다." 선비의 벼루에는 물이 마르지 않는 법이다. 이 개구리란 놈이 벼루 속 촉촉한 물에 몸을 담그고 유영하니 가관일 터. 그가 한참이나 개구리 노니는 짓을 바라보다 시 한 수를 적으니 이러하다.
한움큼 맑은 물 부어둔 보랏빛 벼룻돌 오목한 연지에
청개구리 떠서 노닐며 발짓하니 잔물결이 일렁이네
이 가련한 것아, 끝내 연지 속의 물物인 것이
어찌 비를 만난 교룡처럼 승천할 수 있으랴
벼루 속에서 발버둥치는 청개구리, 그리고 한소하기 그지없지만 여유와 풍류가 철철 넘치는 산림거사의 삶. 금방이라도 화흥이 솟구칠 것 같은 풍경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월전 장우성 화백이 편저자에게 권호문의 시구를 전해 듣고서는 이 책의 권두에 그림을 실었다. 벼루 바닥에 떡하니 버티고 앉은 청개구리 그림은 청초한 문방생활의 애물마냥 사랑옵다. 붓 한 자루, 종이 한 조각이나마 오랜 벗을 대하듯 소중히 간수한 선비의 마음결은 다른 시문에서도 엿보인다.
인조와 숙종 대에 걸쳐 벼슬한 이현석은 자신이 쓰던 붓을 떠나보내며 장례까지 치른 사람이다. 애지중지하던 붓이 몽땅 닳자 애달픈 마음에 무덤을 만들어주었으니 이것이 곧 필총筆塚이다. 영정조 시절 이덕무는 이보다 한술 더 떠 붓무덤 곁에 파초를 심어 붓의 혼을 달랬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예화들은 단원 김홍도가 그림을 팔아 끼니와 땔감 대신 늙은 매화를 샀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슴 한쪽이 우련하면서도 도타운 기운을 북돋운다.
숙종 때까지 살며 대제학과 공조판서를 지낸 김진규는 또 어떤가. 그는 인경황후의 오라버니다. 그는 배소에 먹을거리가 없자 좁쌀 몇 됫박을 얻으려고 금쪽같이 아끼던 필묵을 내주고는 상심한다. 그가 토로한 심회는 이렇다. "서생은 평생 남아도는 물건이 없으나 전부터 종사해 온 직업이 오직 필묵생활인지라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근심할 때나 즐거울 때나 이것에 기탁하여 온갖 정성을 쏟았는데, 하루아침에 두 가지가 없어졌으니 어찌하랴." 학문을 목숨처럼 보듬고 살아온 선비의 곤고한 시절이 눈에 선한 대목이다.
종이, 붓, 먹, 벼루 등 문방사우만 이 책에 언급한 것은 아니다. 붓을 씻는 필가가 있고 팔을 받치는 견각 등 스무 가지가 넘는 아기자기한 곁들이기도 문인들의 사랑을 받은 권속이었다. 사랑 없이 노래가 나올까. 이리하여 [한국문방제우시문보]는 오래된 사랑가로 남을 것이다. 문인들이 그렸다해서 문인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방구에 쏟은 각별한 애정이 있고 호학하는 마음 씀씀이가 있어 문인화가 탄생했을 터이다. 이 책은 '모필시대의 마지막 송가'다. 잊은 것은 잃은 것이 아니다. 일사 선생은 모두가 잊고 있는 진경을 서안 위에 보란 듯이 펼쳐놓았다.
<사족>
이 글은 1995년에 썼던 것이다. 십사 년 전의 글을 다시 읽으니 일사 선생에 대한 회억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다. 선생을 처음 뵌 해는 내가 기자로 일하던 80년대 말이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 자주 찾아뵙지 못했으나 멀리서 가까이서 선생의 족적은 놓치지 않았다. 가까이 뵈면 묵흔의 암향이 흘렀고, 멀리서 들으면 존함의 기세가 우렁찼다. [한국문방제우시문보]는 겨우 몇 자 씩 끄적이곤 하던 나의 졸문에 크나큰 도움을 준 책이다. 어느 때 어느 곳을 펼쳐도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는 선인의 아취는 종내 내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귀중본을 전해주신 선생께 읍한다. 선생과 나 사이에 흘러간 나날은 붙잡을 수 없다 해도 좋은 일은 반드시 앞날에 놓여 있을 것을 믿는다. 이십 년 세월이 마냥 허송은 아니었다. 봄 그늘에 비오려 하니 날아가던 새가 깃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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