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My poems

가을의 기도

그림자세상 2010. 11. 3. 19:52

가을의 기도

 

여 국 현

 

 

어떤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꺾이지는 않기를

오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고 당당할 수 있기를

기쁠 때 온 마음으로 환하게 웃을 수 있기를

슬플 때 속속들이 가슴 열고 부끄럼 없이 울음 쏟을 수 있기를

한 번은 불같은 사랑에 데여 가슴 태우기를

언제나 마음 가득 그리움 안고 살아갈 수 있기를

 

아침 저녁 뜨고 지는 해 보며 마음 설렐 수 있기를

꽃 한 송이 바람에 하늘 거릴 때 내 마음 함께 춤출 수 있기를

말간 강물에 구름 나무 그림자 어릴 때 내마음 함께 흐를 수 있기를

가을 햇살 속 반짝이는 호수에 비친 하늘에 내마음 모두 맡길 수 있기를

 

아이들의 뽀얀 웃음을 언제나 사랑하며 간직할 수 있기를

말끔하고 깨끗한 손에 담긴 삶의 평안함과 정갈함도

기름때 묻고 얼룩진 거친 손에 담긴 치열하고 소중한 삶의 흔적도

하나같이 따로 또 같은 소중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거친 주름 가득한 세월의 흔적을 겸허하게 품어안을 수 있기를 

 

세상 한 두엇쯤에게는 넉넉한 품과 든든한 밑둥

시원한 그늘 가진 큰나무 같은 존재일 수 있기를

세상 한 사람쯤 내게도 그런 이 있어

말 없이 돌아가 기대 안겨 조용히 눈 감고 숨 쉴 수 있기를

 

나 없이도

어둠은 걷히고 새벽은 오고

부지런한 새는 숲 가득 노래를 쏟아내고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흐르고 비는 오고 눈은 나리고

사람들은 웃고 울며 미워하며 또 사랑하더라도

세상 한 귀퉁이쯤 어디 내 머무는 자리에

햇살 한줌쯤은 늘 비추기를

바람 한 번쯤은 늘 불어주기를

비 눈 잊지 않고 한 번 쯤은 찾아주기를

한 사람쯤 나를 기억하며 마음 한 자락 남겨둘 수 있기를

 

나,

삶을 사랑하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왔던 그 어느 날 처럼

아는 이 없이 바람에 안길 어느 날

사랑했다 아름다웠다 행복했다

웃으며 걸어갈 수 있기를

 

단풍나무 사이로 붉게 내려앉는

고궁의 가을 햇살 아래 

마음 한자락 담아

조용히 묻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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