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My poems

어느 새벽

그림자세상 2010. 9. 21. 15:12

어느 새벽

 

여국현

 

 

새벽에 요절한 촉망받던 시인의

유고시집을 읽고 있었다

 

어둠은 창 밖에서 비를 맞으며

연못가를 서성이고

꿈을 꾸는가 버드나무가 가볍게

몸을 뒤채고 있었다, 봄은

꿈 속에서도 멀고

하얗게 말라버린 살갗이 가려웠다

 

물소리의 입자들은 유리를 관통하여

끊임없이 날아들고

나는 한 음악가의 이름을 기억한다

빈민촌 노예 어린이들의 눈동자와

그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던 첼로 소리와

숨어서 지켜보던 여인의 미소가

기억의 저 켠에서 걸어나와 어둠 속에 영사된다

유리창 밖의 어둠은

거대한 스크린이 되고

요절한 시인은 지금 내 곁에 있다

"추억을 꿈꾸는 밤이 영원할 수 없음을 슬퍼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음악가는

언제까지나 폭풍우치는 선상에서

바다를 지휘하고 있을까

그 노예 어린이들은 자랐을까

그 까만 눈동자와 첼로의 선율이

시인의 음성과 겹쳐 빗속에 떨고 있다

 

그리운 건 모두 저 밖의 어둠에 묻혀 있다

 

버드나무는 다시 어둠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고

어둠은 무겁게 내려 앉아

툴툴 빗방울을 연못에 떨구고 있다

나는 이 밝음 속에 갇혀

추억을 꿈꾸고

다시는 깨지 않을 추억을 꿈꾸고

지금 깨어있는 사람들은 모두 푸른 수의를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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