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벽
여국현
새벽에 요절한 촉망받던 시인의
유고시집을 읽고 있었다
어둠은 창 밖에서 비를 맞으며
연못가를 서성이고
꿈을 꾸는가 버드나무가 가볍게
몸을 뒤채고 있었다, 봄은
꿈 속에서도 멀고
하얗게 말라버린 살갗이 가려웠다
물소리의 입자들은 유리를 관통하여
끊임없이 날아들고
나는 한 음악가의 이름을 기억한다
빈민촌 노예 어린이들의 눈동자와
그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던 첼로 소리와
숨어서 지켜보던 여인의 미소가
기억의 저 켠에서 걸어나와 어둠 속에 영사된다
유리창 밖의 어둠은
거대한 스크린이 되고
요절한 시인은 지금 내 곁에 있다
"추억을 꿈꾸는 밤이 영원할 수 없음을 슬퍼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음악가는
언제까지나 폭풍우치는 선상에서
바다를 지휘하고 있을까
그 노예 어린이들은 자랐을까
그 까만 눈동자와 첼로의 선율이
시인의 음성과 겹쳐 빗속에 떨고 있다
그리운 건 모두 저 밖의 어둠에 묻혀 있다
버드나무는 다시 어둠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고
어둠은 무겁게 내려 앉아
툴툴 빗방울을 연못에 떨구고 있다
나는 이 밝음 속에 갇혀
추억을 꿈꾸고
다시는 깨지 않을 추억을 꿈꾸고
지금 깨어있는 사람들은 모두 푸른 수의를 입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