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암스트롱은 "재즈를 모르는자에게 재즈의 맛을 알려주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태백은 "술 취해 얻는 정취는 깨어있는 자에게 전할 수 없다"고 읊었다. 김 추사는 "난초 그림의 기이한 법식은 아는 자만 안다"고 단언했다. 그렇다. 모르는 자는 모르고 아는 자는 아는 경지가 있는 법이다. 어디 재즈와 술과 난초뿐이랴. 글맛이 왜 좋은지를 설명하는 일 역시 녹록치 않다. 이를테면 이런 글의 맛.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수묵 빛깔로 퇴색해 버린 장지 도배에 스며드는 묵흔처럼 어렴풋이 한두 개씩 살이 나타나는 완자창 위로 어쩌면 그렇게도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도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
단문으로 된 앞 두 문장과 달리 제법 긴 끝 문장은 읽는 자의 호흡에 얹혀 참으로 리듬감 있게 굽이친다. 이 글의 맛은 수사에서 오는 것도, 메시지의 정겨움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이미지를 리듬에 실을 줄 아는 너름새에서 오는 것이로되, 들숨날숨 가쁘게 오가는 단문과 불문곡직의 비문에 익숙한 젊은이들의 식미와는 거리가 먼 글이다. 유장과 만연의 곱씹는 맛은 이제 아는 자만 아는 특미가 되어버렸다.
저 문장을 쓴 이가 누구인고 하니, 근원 김용준이다. 그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실례의 말씀이오나 하도 오래간만에 우리 저녁이나 하자고 청하신 선생님의 말씀에 서슴지 않고 응한 것도 실은 선생을 대한다는 기쁨보다는 댁에 매화를 달과 함께 보려 함이었습니다."
소복한 여인네의 성긴 그림자는 매화이 시 분명한데 달빛 아래 핀 그 자체를 보고자 가쁜 숨 몰아쉬며 길 떠난 근원의 정황은 이 같은 진양조의 문장이 아니고서야 형용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럼 근원의 본색은 글쟁이인가. 그는 그림쟁이로 자처했지 문사로 행세할 염이 한 치도 없었다. 하지만 후학들은 서울대학교 미대 초대학장을 지냈고, 한국 전쟁 때 월북한 동양화가인 그를 미술평론가로, 미술사가로, 수필가로 떠받들며 글과 얽힌 인연에서 떼어놓지 않는다. 근원은 아닌 게 아니라 그림에서 寡作이었고 글에서 跨作이었다. 넘치는 글솜씨가 그 덕에 남아 사후 삼십여 년 만에 다섯 권의 책으로 묶였으니, 그것이 [근원 김용준 전집]이다. 이 전집은 근원이 본색을 넘어 천생의 글쟁이임을 증명한다.
전집의 백미는 [새 근원수필]이란 제목이 붙은 제일 첫 권이다. 나머지 네 권은 주로 논문 형식이라 비교가 마뜩치 않다. 그러함에도 [새 근원수필]을 으뜸으로 치는 까닭은 도리없는 나의 익애에 근거한다. 같은 미술사학자라도 우현 고유섭은 필드 워크를 중시한 과학에 빚을 져 행간을 건조하게 몰고 가는 글을 썼고, 혜곡 최순우는 고질병에 가까운 '우리 것 사랑'에 빠져 가끔 혼몽한 나르시즘을 드러내기도 한다. 근원은 어떠한가. 그의 글은 그의 그림과 빼다박았다. 간소한 붓질로 대상의 정채를 잡아내는 감필과 오로지 거속이 목표인 문인화의 과묵한 용필 등이 그의 수필에 더도 덜도 없이 구현된다.
전집의 두 번째 권인 [조선미술대요]에서 그는 우리 민족의 미술을 '부드럽고 구수하고 어리석고 아름답다'고 추량한 바 있는데, 이 말은 그의 글에도 적실한 표현이다. 이때의 '어리석음'은 대교약졸의 졸렬과 통한다. 무엇보다 나는 근원의 호고취미에 바탕을 둔 옛날투의 한문 문장에서 눈이 먼다. 친구인 수화 김환기에서 정든 집을 넘긴 뒤 헛헛한 마음을 달래가며 쓴 글 [육장후기]는 자행간에 툭툭 끼어드는 한문투가 불편하면서도 글쓴이의 회한을 천연스레 감추는 조사법으로 그만한 기교가 드물 것이란 인상을 안긴다. 함께 실린 [두꺼비 연적을 산 이야기]나 [화가와 괴벽] 등은 해학과 농담을 페이소스로 버무릴 줄 아는 그의 장기가 생생하다. 과장하건대 근원의 글쓰기를 '복원 불가능한 문화재적 유미'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새 근원수핑]의 문재가 어디 가겠는가. 전집의 나머지 글도 형식은 논문이되 문체의 곰삭은 맛이 독자의 흥을 불러일으킨다. [조선미술대요]는 중학생 수준에 맞게끔 일치감치 독자으 눈높이를 낮추었다. 본격 미술사라기보다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밝히는 해설서에 가깝다. 삼국시대 미술의 특징을 짚어내는 그의 형안은 지금껏 회자된다. 그는 웅혼하고 씩씩하고 크고 거친 고구려 미술과 장엄하고 건강하며 조화롭고 부드러운 신라 미술, 세련되고 정교하고 아윤하고 유려한 백제 미술 등을 직감적으로 나눌 줄 알았다. 특히 고려 미술을 '멀리 놓고서 바라다보고 싶기보다 손에 들고 어루만져 보고 싶은 맛'으로 기술한 부분에서는 그의 곰살맞은 눈매에 무릎을 칠 정도다.
셋째 권 [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에 부록으로 실린 [조선화의 기법]은 자신의 학습과정을 토대로 우리 그림의 재료와 운필, 묘사, 사생, 채색 등에 대해 존조리 설명한다.
넷째 권 [고구려 구분벽화 연구]는 월북 이후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것으로, 이 분야의 모본으로 손색없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안악삼호분에 그려진 인물의 정체를 밝히는 대목은 후학이 본받을 만하다. 조목조목 파고들어가는 학자의 궁구심이 내내 감탄스럽다.
다섯째 권 [민족미술론]은 신문, 잡지, 학술지 등에 실린 미술론과 평론 등을 모았고 근원의 회화작품과 도서장정용 작품도 실려 있다.
전집을 낸 출판사는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이란 책도 잇달아 펴냈다. 새로 발굴한 근원의 산문과 회화작품을 모은 일종의 보유판이다. 근원의 수필은 끼무룩하게 멀어진 전시대의 추억과 향수를 눈앞에 불러모은다. 근원 읽기는 맹목적인 의고 취향에 머물지 않고 세월에 묻힌 참가치를 오늘 다시 그루갈이 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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