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My essay-to remember the past

쌍용에 관한 몇가지 사소한 기억들(5)

그림자세상 2010. 8. 4. 00:56

  아버지와 동행을 생각하면 떠 오르는 또 하나의 그림. 장성에서 제천까지의 밤열차, 새벽에 도착한 제천역에서의 국밥, 이른 아침 찾은 할머니 산소.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들은 제천을 떠나 아버지가 직장을 잡은 장성으로 이사를 갔다. 먼 길이었고 낯선 곳이었다. 많은 이야기들이 담긴 곳이기도 한 장성 생활의 8할은 슬픔이었지만 그곳은 내 유년의 기억들이 가장 많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직장 내외의 여러가지 일로 바빴던 중에도 명절이나 기일이면 쌍용에 있는 할머니의 산소를 찾았다. 장남인 나는 그 길에 동행해야 했다. 기차를 타고 간다는 자체도 싫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기억도 남기지 않은 채 이별을 했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내게 특별한 분이셨다.

  장성에서 쌍용 가는 길은 멀었다. 장성역을 출발한 기차를 타고 대전까지, 다시 제천행 열차를 기다렸다 타고 가는 그 시간은 어린 나에게는 참 긴 시간이었다.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였나보다. 가는 열차 안에서 아버지는 소주를 드셨고, 나는 계란을 먹었다. 어느땐가는 대전 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술이 불콰해진 채 주무시는 아버지를 깨워 가까스로 내린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소주를 드시고 주무시기도 하셨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처음 얼마간은 창밖을 보고 기차 안 사람들을 보느라, 그리고 나중에는 아버지를 대신해 역을 지나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했기에. 그런 나를 믿으셨던 것일까. 내 기억에 아버지는 언제나 쌍용 가는 길이면 열차 안에서 소주를 마셨다. 한번은 새벽녘에 도착한 제천역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아버지를 깨우느라 미리부터 한동안 부산을 떤 다음에야 겨우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내린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아버지는 태평이셨다. 겨우 역에 내린 아버지는 천연덕스럽게 '다 컸네. 이젠 너 믿고 그냥 가도 되겠다' 하시고는 역 앞 식당에서 해장국을 시켜 시원하게 드셨다. 아직 새벽의 어둠이 걷히지 않은 기차 역에서 조금전 열차 안에서 잠들어 일어나지 못하는 아버지 때문에 애를 끓였던 생각에 속으로 화가 잔뜩 나 있었던 나는 먹는둥 마는둥 했지만 그 새벽에 먹는 국밥의 맛은 조금전까지의 화와 서운함과 추위를 다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첫차를 타고 도착한 쌍용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는 눈이 가득했다. 길에서 빤히 보이는 언덕에 소나무에 둘러쌓인 할머니 산소까지는 불과 100여 미터, 그러나 눈쌓인 밭과 산길을 올라야 하는 길이라 어린 나에게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한참을 보던 아버지는 "업혀라" 하셨다. 나는 망설였다. 아버지는 아직 술이 완전히 깨지 않은 것 같았고 눈은 깊어 보였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업고 산길을 오르셨다. 혼잣 몸으로 오르기에도 만만치 않은 상태였다, 아버지도 눈 쌓인 길도. 결국 얼마나 올랐을까, 아버지가 삐끗하시더니 미끄러지면서 아버지와 나는 밭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굴렀다. 아버지는 내가 다쳤을까 놀라는 눈치였지만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업자고 하셨다.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다시 아버지 등에 업혔고, 아버지는 나를 업고 할머니 산소엘 올랐다. 무슨 말을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웃으셨던 것도 같고, 아버지 등에 업혔던 나는 좀 어색하면서도 싫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내가 아버지 등에 업힌 것은, 아니 아버지가 나를 업었던 것은.

  할머니 산소에 제를 올리고 눈쌓인 산소 옆에 앉아 아버지는 물으셨던 것 같다. "네가 여기 찾아올라, 나중에?" 나는 뭐라 대답을 했을 것이다. 분명 그런다, 했을 것이다. 의례적인 말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계신 분이었다. 딱히 무슨 추억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떠오르는 일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나를 가장 많이 안아주셨던 분이었을 것으로 기억할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할머니'라는 말을 떠올리면 마음 한켠이 아릿하다. 그래서 그때도 나는 아마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온다고, 오고 말고요. 아버지는 그 말을 믿지는 않더라도 기분이 좋아지셨던 것 같다. 한참을 그렇게 할머니 산소에 앉아 있던 아버지와 나는 그 눈길을 내려와 큰 길 옆에 사는 아버지 친구분 집에 들러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읍내에 사시는 큰아버지 댁에 들렀다가 다시 갔던 길을 그대로 돌아 열차를 타고 왔다. 그 길은 갈 때보다 더 멀었고, 돌아올 때의 아버지 모습을 갈 때 보다 더 피곤하고 힘들어 보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술을 드시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보거나 눈을 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이상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잘 수 있었으니까. 어쨌건 그리고 난 뒤 아버지와 쌍용을 가는 동행은 몇번 더 이어졌다. 그동안 내내 아버지는 술을 마셨고, 나는 깨어서 그 시간을 지켰다.

  한참 나중에야 나는 알게 되었다. 올 때는 술을 마시지 않는 아버지가 쌍용에 갈 때면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아니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맨 정신으로 마주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 있는 법이라는 것을. 떠나와야 했던 그곳이 자의로 떠나와야 했던 곳이 아니었다면 더욱 그곳을 다시 찾게 되는 그때, 눈을 감고, 마음을 닫고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물론 이것은 그저 조금 더 머리가 크고 마음이 자란 뒤에 얼핏 아버지를 통해 들은 단편적인 이야기를 통해 내가 짐작하는 것일 뿐 나는 아직 아버지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없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되던 해, 아버지가, 아니 정확하게는 우리 가족이 장성을 떠나 포항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을 때 나는 가기 싫다며 고집을 피우고는 그곳에 혼자 남아 자취를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내 고집을 꺾지 못했고, 아니 어쩌면 꺾지 않았고, 나도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나 혼자는 힘드니 읍내 고등학교 다니며 자취하는 형들과 함께 있는다는 선에서 아버지와 타협책이 마련되어 나는 2학년 4월이 될 때까지 혼자 남아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몇번 혼자 쌍용 할머니 산소를 찾았다. 아버지와 같이 가던 그 길을 혼자 밤 열차를 타고 대전에서 내려 제천행 열차로 갈아타고, 새벽녘에야 제천역에 내려 국수나 국밥을 먹고, 첫차를 타고 쌍용 할머니 산소엘 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 산소 옆에 앉아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마음이 편안했다. 길가로 지나가는 시멘트 실은 화물차를 보고 하늘의 구름을 보고 멀리 어릴 적 뛰놀던 사택 앞 길과 공터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멈춰선 것 같았다. 해가 중천을 지나 내 그림자가 동쪽으로 길어지기 시작하면 나는 할머니 산소를 내려와 마을길을 지나 버스를 타고 제천으로 나왔고, 열차를 타고 대전을 거쳐 다시 장성으로 돌아오는 긴 시간에 몸을 맡겼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내가 왜 문득 그리도 할머니 산소엘 가고 싶었는지. 그래서 훌쩍 그 기차에 올랐는지. 그렇게 가는 그 길이 왜 그리 편안하고 마음 따뜻했는지. 포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직장을 다닐 때도 나는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고 한번씩 할머니 산소를 찾았다. 읍내에 사시던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산소 바로 아래 나란히 잠드신 뒤에는 할머니와 큰아버지 두 분의 산소를 나란히 내려다 보며 그렇게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나를 업고 오르다 미끄러져 굴렀던 그 밭길을 지나고, 지날 때마다 나를 업었던 아버지의 등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한 없이 미울 때도, 미운 만큼 그리울 때도. 지금 아버지는 등이 굽어 똑바로 펼 수 없다. 이젠 나를 업는 것은 물론 그 산소길을 제대로 걸어 오르시기도 힘들어 하신다. 그동안 나는 한번도 아버지를 업어드린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