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루비아 이야기. 큰아버지 이야기에서 훌쩍 건너 뛴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가기로 한 터이니. 큰아버지 이야기는 나중에 잇기로 하고 문득 오늘 떠오르는 사루비아에 관한 아픈, 그러나 오래오래 기억된 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사루비아. 짙은 주홍빛 가느다란 몸에 쪽 하니 뻗은 날렵한 몸을 한, 똑 따서 잎 속 단물을 쪽 빨아먹곤 하던 꽃, 이름만 들어도 오른쪽 뺨이 뜨겁게 화끈 얼얼해지는 꽃, 사루비아. 살비아(salvia) 또는 세이지(sage)라고도 하는, 꿀풀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원산지는 지중해란다. 그 색과 모양 생각하면 고개 끄덕여진다. 이름--현자(sage)--치고는 다소 과한 나긋함에 어설픈 관능미마저 느껴지는 외모를 한 꽃. 그러나 사루비아 이름을 들을 때 내 뺨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은 관능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각설하고, 초등학교 3학년 혹은 4학년이었을 것이다. 장성중앙국민학교 운동장 윗편, 교실과 운동장 스텐드 사이의 화단, 그 화단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던 꽃이 사루비아였다. 2층 교실에서도, 운동장에서 눈에 쏙 들어오는 붉은 빛의 사루비아가 활짝 피어나는 때가 되면 아이들은 강한 유혹에 시달리곤 했다. 색의 관능성을 알만한 나이들은 아닌 터라 사루비아의 붉은 색에 매혹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아는 터였다, 사루비아 그 꽃술의 달짝한 맛을.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스탠드 옆 화단 주변에는 그렇게 꺾여 단물 빨린 채 누운 사루비아들이 지천이었다. 아이들은 축구를 하다가도 달리기를 하다가도 혹은 그저 아무 까닭없이 계단을 내려오다가도 일삼아 화단을 지나며 사루비아를 똑 따 그 단물을 쪽쪽 빨아먹고 던졌다. 아카시아의 풍성함은 없었으나 달기로 치면야 댈 바가 아니었다. 그렇게 사루비아는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사랑의 연유가 사루비아가 뽐내는 빛깔도 모양도 아닌 그 달달한 단물이었고 그 댓가, 컸으나 달리 도리 없는 일이었다, 사루비아로서는.
그런 사루비아를 진정 사랑한 분이 계셨다. 그 사랑의 이유가 사루비아의 단물때문이 아니라 그 꽃의 색과 모양때문이었다, 라고 지금도 여전히 나는 짐작할 뿐인 한 분, 바로 교감선생님이셨다. 그 분은 진정 사루비아를 사랑하셨다. 아니 어쩌면 화단을 사랑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하는 화단에 사루비아가 심어져 있어 사루비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거나, 아니면 사루비아를 종하하셔서 화단에 그 꽃을 심으셨던 게다. 순서야 어찌되었건 교감 선생님의 사루비아 사랑은 지극했다. 아이들이 사루비아 단물을 빼먹으려고 꽃을 꺾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비록 숫적인 열세 때문에 늘 패할 수밖에 없는 전투였지만 교감 선생님은 최선을 다하셨다. 눈물겨운,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쉬는 시간, 점심 시간 마다 화단 바로 앞의 교무실 창문에 뒷짐을 진 채 서서 밖을 바라보는 교감 선생님의 눈은 매의 눈, 까지는 아니었겠으나 뭐 돌담 위에 훌쩍 올라가는 닭 쳐다보는 불독 정도의 눈매는 장차하고 계셨다. 월요일에 운동장에서 하는 전체 조회가 끝날 때쯤 늘 마지막 마이크를 잡으시는 분은 교감 선생님이었다. "화단의 사루비아 건드리지 마세요. 따먹지 마세요. 꽃들도 생명이 있는 존재고, 아픔을 아는 생명입니다.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마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절대 사루비아를 따먹는 일을 하지 않도록 당부하는 바입니다."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대충 그런 말씀이었을 것이다. 아이들 몇은 그 말을 들으며 화단의 사루비아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는 말은 아니다. 맹세코 나는 아니었다. 나는 대체로 착한 학생이었으므로. 하지 말라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그런 훌륭한 착한 학생,이 아니라 그냥 안 하는 게 좋은 일은 대체로 안 하는,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은 또 해봐야 하는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 한마디로 그냥 그렇고 그런 학생이었던 것. 하기 싫은 일은 또 용케 잘 안 하고 지내는 법을 만들어가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지킬 건 지키는 그런 중간치 정도는 되었다. 딱 한 번 그 안 하고 싶은 일 안 하려고 꾀 부리다 된통 낭패 당한 적은 있지만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음 이 말을 하면 옆길로 새는 것이라는 것쯤은 아는 분들은 안다. 뭐 어떤가. 남는 게 시간은, 아니지만 나왔으나 생각해 본다.
시기적으로 사루비아와 관련된 그 일이 있었던 그 어느 언저리였을 것이다. 학교에서 체육대회를 했다.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가장 공을 들인 것이 4,5,6 학년 남학생 전체가 참여하는 태권도 품세 시범 같은 것이었다. 가을 뜨거운 햇살 아래 한 시간 넘게 하고 또 하는 그 시간이 싫었던 나는 어느 하루 그 연습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을 한다. 처음에는 교실에 남아 있을 계획이었지만 호리호리한 체육선생님이 반 마다 돌아다니며 검사를 하는 통에 결국 몸을 숨겨야 했다. 그래서 간 곳이 화장실. 기억하시는 분들 있을 것이다. 당시의 재래식 화장실. 색도 냄새도 화려했다. 거길 간 거다. 그런데 비극은 늘 떼로 일어난다. 화장실 문을 여는데 열리는 문이 없다. 모두 안에서 잠겨 있다. 의아해할 필요도 없었다. "아따, 꺼져, 임마, 너땜에 다 들킨당께!" 칸칸마다 이미 교실에서 밀려와 숨은 녀석들로 다 들어차 있었다. 한 칸 마다 한 녀석도 아니었다. 둘 혹은 셋 씩 그 구수한 냄새나는 화장실 안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to be or not to be" 그래, 딱 그랬다. "거기 있거나 혹은 거기 안 있거나." 결국 나는 거기 있기로 선택을 하고 그 냄새나는 똥통 안에 몸을 숨긴 녀석들의 인정에 호소했다. 이내 한 곳의 문이 열렸다. 나의 호소가, 내 기막힌 웅변술이 통했던 것,이 아니다. 딱 한마디 때문이었다. "쪼끔 있으면 선생님 올텐데...." 그 말 한마디였다. 한 녀석이 문을 열더니 "언능 들어와, 새꺄! 아따, 염병할 새끼, 너땜시 염병, 다 잽히가게 생겼당께!" 여기서 잠깐, 내가 사투리를 쓰지 않는 것으로 묘사한 것을 두고 혹 저혼자 잘난 체 뽐내려고 사실을 왜곡하는 글, 이라고 오해하실 독자분이 계실까 싶어 미리 말쓰드리자면, 나는 어디에 살 때도 사투리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 강원도 쌍용, 충북 제천, 전남 장성, 그리고 경북 포항, 어디에서도 나는 그곳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모를 일이다, 왜 그런지는. 그런 연유때문인가. 22년째 살고 있는 서울에서 나는 서울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나는 내 말, 어투의 본적을 알 길이 없으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제주도를 제외한 어떤 지방 사투리도 내게 어색하지 않다는 것. 하여간, 그런 연유로 그 당시 내가 사투리를 쓰지 않은 것이니 혼자 잘난 체 하느라 사투리 안 쓴 것으로 사실 왜곡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시기를.
어쨌건 똥통 문을 열고 봤더니 올망졸마 세 놈이 낑겨 있었다. 잘못하면 똥통에 빠지게 생겼다. 똥통에 빠져 똥독 오른 이야기는 그 당시 시집 안 간 처자 아이 낳는 일 정도로 흔해빠진 이야기였던 때이기도 했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끼어들었고 숨을 참았다. 가관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봤다면. 땡볕에 태권도 하기 싫다고 똥통에 올망졸망 숨은 까까머리 사내녀석들. 그러나 우리의 눈물겨운 노력은 실패도 끝나게 예정되어 있었다. 보통은 교실만 훓고 지나가던 체육선생님이 그날은 작정을 한 모양인지 화장실까지 왔고 열명 남짓한 무리들이 똥통에까지 숨은 치열한 분투에도 불구하고 끌려나와 아이들이 태권도 연습을 하는 한참 동안 자잘한 돌맹이 가득한 운동장에서 원산폭격을 받았다. 나한테 문을 열어주었던 그 녀석의 그 이글거리던 눈동자가 지금도 기억난다, 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나 그랬을 것이다. 그후로 오랫동안 가끔 복도를 지날 때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할 때 뒷통수가 따가왔다. 녀석의 레이저가 강력했던 모양이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은 아니고 그 당시의 일탈이었다고나 할까.
다시 사루비아로 돌아가자. 어디까지 했더라, 보자, 아, 그래, 나는 사루비아를 따먹지 않았다. 맹새코, 단 한 번도, 인지는 좀 가물가물하지만 하여간 안 따먹었을 것이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고 또 기억하고 싶다. 그래야 이 이야기가 좀 더 극적이 된다. 한 번도 안 따먹었다, 그래야. 그러니 그냥 믿으시길. 하여간 그러던 내가 운명의 그날, 그 점심시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화단의 사루비아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그 강렬함이라니. 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점심시간, 축구를 하고 있던 내게 화단의 사루비아는 너무도 강렬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나, 달아!"
모든 유혹은 강렬하다. 또 마땅히 강렬해야 한다. 사루비아가 "나, 달아!"라고 유혹했다는 것, 뭐 그건 순전히 지금 이야기다. 그때는 사실 그냥 사루비아가 눈에 훅 들어왔다. 나는 천천히 화단으로 다가갔다. 운동장에서 화단까지 가려면 스텐드를 올라가야 되는데, 이게 한 4단쯤 되었다. 작은 보폭으로 성큼성큼,이 아니라 쏭큼쏭큼 올라가 화단에 다가가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모습. 교무실 창문을 반쯤 열고 화단을, 사루비아를,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화단에, 사루비아에 접근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는 교감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멈춰야했다. 그렇게 얼굴과 얼굴을, 눈과 눈을 떡 하니 마주치고도 다가가 사루비아를 따먹는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제정신으로 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제정신이었다. 그 정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는 아니고 그랬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저렇게 보고 계시면 내가 한 두잎 따먹는 거 보시겠지. 많이 따먹지 않는다는 거 아실 것이고, 보는 데서 그러니 얼마나 먹고싶으면 저럴까 이해하시겠지, 선생님이시니 그렇게 알아 주시겠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화단의 사루비에 손을 뻗쳐 사루비아를 따먹었다. 하나 혹은 둘.
교무실 창문이 드르륵 요란스럽게 열렸다. "야, 임마, 너, 이리 왓! 이리 올라왓!" 교감 선생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는 단맛을 채 음미하기도 전에 고개를 들고 선생님의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야, 임마, 너 교무실로 왓!" 다시 한 번 불호령이 떨어졌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예감이 강렬하게 스쳤을 것이다. 몸이 잠깐 경직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상태로 스탠드를 걸어 교무실로 향하는 건물 정문을 향해 가는데 친절하게도 교감선생님이 서둘러 마중을 나오셨다. 드문 일이긴 했다. 내가 장학사도 아닌데. 실내화를 신고 잰 걸음으로 달려나온 교감선생님이 여닫이 문을 열자마자 나를 강하게 끌어안고 토닥여주,시지 않은 것은 자명한 일. 갑자기 눈 앞에 별이 핑그르르 돌았다. 오른쪽 뺨이 화끈거렸다. 교감선생님은 왼손잡이였나보다. 하여간 기억에는 그렇다. 오른쪽 뺨이 먼저 화끈거렸다. 이어서 왼쪽 뺨도. 강도는 분명 오른쪽 뺨이 셌다. 내가 교감선생님이 왼손잡이라 추정하는 이유다. 뭐 확실하지는 않다. 어차피 기억이라는 것, 그리 믿을 게 못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아팠다는 거. 눈물나게 아팠다는 거. 실제로 눈물도 흘렸다는 거.
교감선생님의 일장 연설도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렇게 뺨이 얼얼해진 뒤의 일들은 내 기억에는 자세하게 없다. 멍했고 멍했다. 억울하기도 했다. 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팠다. 어떻게 그리 정확하게 최고의 강도를 얹은 어른의 손이 아이의 뺨에 닫을 수 있는 것인지. 겁도 안 났는지. 그러다 휙 하니 넘어지거나 고개라도 삐었다면 어쩔뻔 했을까. 나는 지금 여기 이렇게 앉아 헛소리 하듯 이 글도 못치고 어쩌면 영화에서나 나오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하반신 마비로 평생을 지낼 뻔 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하여간 교감선생님의 타격은 정확했고 강력했다. 나는 아파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또 무엇때문에 울었다. 한참 울었다. 몇개 더 먹을 시간도 안 주고 그렇게 빨리 쫓아나오다니, 아마 그런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러나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런 느낌은 분명했다. 어렸지마 그 정도 느낌은 분명했다. 나는 무언가 할 말이 있었는데,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그 뒤로 나는 사루비아라는 말만 들으면 뺨이, 특히 오른쪽 뺨이 분명하게 화끈거리며 얼얼해진다.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흘러 이 이야기를 학생들 앞에서 하게 될 기회가 있을 때 나는 꼭 덧붙인다. 어떤 잘못을 한 아이들이라도 먼저 그 이유를 물어보고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한다, 는 생각을 그때 사루비아 따먹다 교감선생님께 뺨 맞은 그때 하게 되었다고. 거짓말이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의 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전후야 큰 상관 없다. 그 일이 내게 준 것. "누가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먼저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벌은 나중이다. 그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고 또 같은 솔직하게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는 것이 먼저고, 나머지 모든 것은 그 다음에 할 일이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다. 아이건 어른이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해 어느 하루, 사루비아, 그 붉은 색이 내 뺨과 마음에 남긴 흔적이 그렇게 붉고 붉었다.
사족 : 그때 우리집은 학교 교문에서 불과 10분의 거리였다. 성당을 지나 성당에서 소를 기르는 목장을 돌아가는 그 앞, 좁은 길에 면해 있던 담 높은, 텃밭에 채소며 오이, 가지 가득했던, 아이들 옹기종기 모여 소쿠리에 끈 달아 세워 놓고 그 안에 놓은 쌀 보고 날아와 앉은 참새들 잡느라 법석을 떨기도 하던 그 집 작은 방 둘이 우리 집이었다. 그날, 교감선생님에게 온 몸이 후끈 달도록 열려하게 환영받느라 다 느끼지도 못했던 사루비아의 달달한 맛, 그 맛, 궁금했다. 저녁 어스름진 학교, 모두 떠난 그 운동장 스탠드를 조심스럽게 올라간 나는 사루비아를 따먹었다. 그 화단 안의 온 사루비아를 다 따먹었다, 라고 말 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 정도의 무모함은 없었다. 그저 조금, 점심 때 맛보지 못했던 달달함을 느낄 만큼의, 거기에 뺨에 새겨진 교감선생님의 손자국과 붉은 멍을 교환할 수 있을 만큼 사루비아를 조금 더 따먹었던 것 같다. 물론 이것도 따먹은 사루비아의 양에 관한 한 전적으로 확실한 기억은 아닐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감선생님의 사루비아 사랑은 강렳했다는 것, 그리고 사루비아를 따먹으면서 한 번 더 울었다는 것. 왜 울었는지 그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때 내 눈물을 받아 한뼘은 더 자랐을 그 사루비아들은 혹 알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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