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지상의 양식-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13)

그림자세상 2010. 8. 3. 23:34

블리다에서

 

회향이 커다란 줄기들(황금빛 일광 밑에, 또는 육중한 유칼립터스나무의 쪽빛 잎사귀 밑에 녹금색의 꽃들이 찬연히 피어 있다). 그 초여름날 아침 사엘로 향하여 거닐던 길가에 회향들은 비길 데 없이 화려하였다.

그리고 놀란 듯한 또는 태연한 듯한 유칼립터스나무들.

자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없다.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총괄하는 물리의 법칙. 어둠 속을 달리는 열차, 아침이 되면 열차는 이슬로 뒤덮인다.

 

갑판에서

얼마나 밤마다, 아아---선실의 둥그런 유리창, 닫혀진 현창이여---얼마나 밤마다 잠자리에서 너를 바라보며 생각하였던 것이랴---[저 현창이 발아지면 새벽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일어나서 멀미를 떨쳐 보리리라. 새벽은 바다를 씻어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미지의 땅에 도달하게 되리라.] 새벽은 왔으나 바다는 가라앉지 않았으며 육지는 아직도 멀어 동요하는 해면 위에 나의 상념은 비틀거렸다. 온몸에서 가셔지지 않는 파도의 멀미, 저 넘실거리는 장루에 무슨 상념을 얽매어 볼까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파도여, 저녁 바람에 휘날리는 물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라 말인가? 나는 나의 사랑을 파도 위에 뿌린다. 나의 상념을 불모의 만경창파 위에 뿌린다. 나의 사랑은 연속되는 한결같은 파도 속으로 잠겨 버린다. 파도들은 지나가고 눈은 그것들을 분간할 수도 없다---형상 없이 동요하여 마지않는 바다, 인간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너희들은 말이 없다.

 

그 유동성을 가로막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아무도 그 침묵을 들어 볼 수 없다. 지극히 연약한 배에 이미 파도는 부딪쳐 그 소리는 풍랑의 요란함을 알려 준다. 커다란 파도들이 밀려와서는 소리도 없이 서로 뒤를 이어 간다. 파도는 파도에 뒤를 이어. 어느 파도나 한결같이 같은 물을, 자리를 거의 옮기지도 않고 밀어 올린다. 다만 형태만이 움직일 뿐. 물은 휩쓸렸다가 떨어질 뿐으로 뒤를 잇지는 않는다. 모든 형태는 지극히 짧은 순간 같은 존재로 나타날 뿐이다. 모든 것을 통하여 형태는 그대로 계속되다가는 이어 그 존재를 포기한다. 나의 넋이여! 어떠한 사상에도 얽매이지 말라. 어떠한 사상이든 그것을 휩쓸어 가는 바닷바람에 던져 버려라. 천국에까지 사상을 가지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파도의 움직임! 나의 사상을 그처럼 넘실거리게 만들어 준 것은 너희들이다! 파도 위에 너는 아무것도 쌓을 수 없으리라. 어떠한 무게라도 파도는 피하여 달아나고 만다. 이 어이없는 표류 끝에, 이 정처 없는 방황 끝에 다사로운 항구는 올것인가? 그리하여 회전등대 가까이 튼튼한 제방 위에서 마침내 안식을 얻은 나의 넋이 바다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제 4 장

 

1

 

어느 정원 안에---플로렌스의 언덕 위(피에졸 맞은편의 그 언덕) --- 그날 저녁 우리는 거기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알 리가 없다. 앙게르, 이디예, 티티이르여, 나의 청춘을 불사른 열정을 하고 메날끄는 말하였다(나타나엘이여, 이제 나는 그대에게 그것을 나의 이름으로 거듭 말하는 바이다). 나에게는 시간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언제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선정한다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선택하지 않는 것을 물리치는 것으로 나에게는 생각되었었다. 나는 무섭도록 시간의 협착함과 시간이 하나의 차원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폭이 널따란 것이었으면 하였건만 그것은 한낱 선에 지나지 않았고, 나의 욕망들은 그 선 위를 달리면서 서로 짓밟지 않으면 아니되었었다. 나는 이것 아니면 저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에 이것을 하면 곧 저것이 아쉬워져서, 나는 번번이 애타는 마음으로 두 팔을 벌린 채 아무것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었다. 잡으려고 팔을 웅크리면 무엇이든 [하나]밖에 잡히지 않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때부터 다른 많은 공부를 단념할 결심이 서질 않아서 무슨 공부든지 오래 계속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나의 일생의 과오가 되고 말았다. 무엇이든지 그러한 대가를 치뤄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은 너무 값비싸게 생각되었고, 이론으로써 나의 고민은 해결될 수 없었다. 휘황찬란한 것들이 가득 찬 시장에 들어서면서 쓸 수 있는 돈이라고는 (누구의 덕분인가?) 너무나 적은 액수에 지나지 못하는 것을! 쓸수 있는 돈! 선택한다는 것은 영원히, 언제까지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었으며, 수많은 그 [다른 것들]이 어떠한 하나의 것보다도 더 좋아 보였었다.

 

지상에서의 모든 [소유]에 대한 나의 반감은 그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것밖에 소유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두려운 것이다.

상품이여! 저장품이여! 수많은 물품들이여! 왜 너희들은 순순히 몸을 내맡겨 주지 아니하는가? 지상의 재물들은 탕진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나는 안다(무진장으로 대치되는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또 나는 내가 비운 잔이, 나의 형제여, 그대에게는 비어 있는 잔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샘터가 가까이 있기는 하여도). 그러나 너희들, 형상 없는 상념들이여! 자유로운 생의 형태들, 지식과 신의 인식이며, 진리의 잔, 마르지 않는 잔들이여, 왜 우리들의 입술에 흘러들기에 인색한가? 우리들의 갈증이 아무리 해도 너희들을 말라 버리게 할 수는 없을 것이며, 너희들의 물은 연달아 새로 내미는 입술을 위해 항상 신선하게 넘쳐 흐를 것이거늘----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이 광대한 영천의 모든 물방울들이 한결같이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작은 물방울일지라도 우리를 도취시키기에 족하며, 우리에게 신의 전체와 총체를 계시하여 준다는 것을. 그러나 그 당시 미칠 듯하던 내가 무엇인들 바라지 않았으랴! 나는 생의 모든 형태를 부러워하였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면 무엇이나 나는 그것을 [하고]싶었다. 그것을 이룩해 놓았으면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나의 말을 알아들어 다오---왜냐하면 나는 별로 피로며 고통을 두려워하는 일이 없었다. 차라리 그것을 생의 수행이라 믿었던 것이다. 나는 파르메니드가 터키 말을 배우고 있던 까닭에 그를 3주일 동안 질투하였다. 그 뒤 두 달이 지나서는 천문학을 알게 되었던 테오도즈를 질투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모습을 제한하지 않으려면 나머지 나에 관하여 가장 막연하고 가장 모호한 모습밖에 그려 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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