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지상의 양식-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9)

그림자세상 2010. 2. 21. 14:36

  모든 것은 제때에 오게 마련이다, 나타나엘이여. 사물마다 제 요구에서 태어나는 것이어서, 말하자면 외부로 나타난 하나의 요구에 불과하다

  [나에게는 폐가 필요하다]고 나무는 말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수액은 잎이 되어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호흡을 하고 난 다음에 나의 잎은 떨어졌으나 나는 그래도 죽지 않았다. 나의 열매는 생명에 관한 나의 온 세상을 간직하고 있다.]

  나타나엘이여, 내가 이와 같은 우화의 형식을 남용한다고 걱정하지 말라. 나도 그런 것을 그다지 찬성하지 않으니까. 나는 그대에게 생명 이외의 다른 예지를 가르쳐 주고 싶지 않다. 생각한다는 것은 크나큰 시름이기 때문이다. 나는 젊었을 때 나의 행동의 결과를 멀리 더듬어 보느라고 지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행동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죄를 범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렇게 썼다. [오직 나의 넋을 회복할 수 없게 독해함으로써만 나는 나의 육체의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고. 그러고 보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타나엘이여, 나는 이미 죄악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는 많은 기쁨을 대가로 치러야만 사색의 권리를 조금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사색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정말 강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타나엘이여, 모든 사람들의 불행은 항상 저마다 자기 나름으로 바라보며, 보는 것을 모두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점에서 오는 것이다. 사물들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은 우리들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그 사물 자체를 위하여서다. 그대의 눈은 그대가 보는 사물 바로 그것이어야 할 것이다.

  나타나엘! 나는 그대의 아름다운 이름을 부르지 않고서는 단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다.

  나타나엘이여, 나는 그대를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여 주고 싶다. 나타나엘, 그대는 나의 말의 비장한 뜻을 충분히 이해하는가? 나는 더욱 그대에게로 가까이 가고 싶다. 마치 엘리사가 슐라미트의 아들을 소생시키기 위하여 그의 위에---입에 입을, 눈에 눈을, 손에 손을 대고 누웠듯이---빛나는 나의 심장을 아직도 어둠에 잠긴 그대의 심혼에다가 붙이고, 나의 입을 그대의 입에, 나의 이마를 그대의 이마에 얹고, 그대의 싸늘한 손을 나의 타는 듯한 손에 쥐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대의 몸 위에 쭉 내 몸을 겹쳐 눕고 싶다.....

  ([그리하여 어린이의 육체는 훈훈하게 온기가 돌았더라]고 쓰여 있다....)

  그대가 쾌락 속에서 눈을 뜨고---[나를 버린 다음]---약동하고 분방한 생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나타나엘이여, 나의 넋의 화끈한 열이 여기 있다---그것을 가지고 가거라.

  나타나엘, 그대에게 열정을 가르쳐 주마.


  나타나엘이여, 그대를 닮은 것 옆에 머물지 말라. 결코 [머물지 말라.] 나타나엘이여, 주위가 그대와 흡사하게 되자, 또는 그대가 주위를 닮게 되자 거기에는 이미 그대에게 이로울 만한 것이 없다. 그곳을 떠나야만 한다. [너의] 집안, [너의] 방, [너의] 과거보다 더 너에게 위험한 것은 없다. 무엇이건 그것이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교육만을 거기서 받아라. 그리고 거기서 철철 흘러나오는 쾌락이 끝까지 흘러 그것을 고갈시키도록.

  나타나엘이여, 그대에게 [순간들]을 이야기하여 주마. 그 각 순간의 [현존]이 얼마나 힘찬 것인지 그대는 아는가? 그대가 그대의 생의 가장 짧은 순간에까지 충분한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 것은 죽음에 대하여 충분히 꾸준한 생각을 지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순간이, 말하자면 몹시 캄캄한 죽음을 배경으로 하고 떠올라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처럼 영롱한 빛을 던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대는 모르는가?

  모든 일을 할 시간이 나에게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 예고되어 있고 증명되어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일도 할 시간이 있으므로, 어떤 일을 시작하려다가 그만두고 우선 나는 쉬고 볼 것이다. 만약에 이 같은 나의 생의 형태가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른다면---그리고 이 생을 살고 나면 나는 밤마다 내가 기다리는 잠보다도 좀 더 깊고 좀 더 망각이 짙은 잠 속에 쉬리라는 것을 모른다면, 내가 하는 일이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일밖에 못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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