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지상의 양식-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12)

그림자세상 2010. 7. 24. 10:56

시라쿠사에서

 

밑이 평평한 배. 낮게 드리운 하늘은 이따금 훈훈한 비로 변하여 내리고, 물 속에서 자라는 풀들의 흙탕 머금은 냄새, 얼크러진 줄기, 솟아오르는 이 푸른 샘도 깊은 물 때문에 자취를 볼 수 없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 황량한 평원 속에서, 이 천연의 번듯한 수반 속에서, 물이 파피루스나무들 사이로 피어오른 꽃처럼 넘실거린다.

 

튜니스에서

푸르디푸른 하늘 속에 흰 것이라곤 다만 한폭의 돛, 초록이라고는 물 위에 어리는 돛의 그림자뿐.

밤, 어둠 속에 반짝이는 반지들.

달빛 흐르는데 사람들 거닐며, 낮과는 판이한 상념들.

사막에 비치는 불길한 달빛. 묘지를 서성거리는 마귀들. 푸른 돌바닥을 디디는 맨발들.

 

말타에서

아직 환하게 밝으면서도 그늘은 사라졌을 때, 광장 위에 내리는 여름철의 황혼이 빛어 내는 야릇한 도취감. 특이한 흥분.

나타나엘이여, 내가 본 그지없이 아름다운 정원들의 이야기를 하여 주마.

플로렌스에서는 장미꽃을 팔고 있었다. 어떤 날에는 시가 전체가 향기를 뿜는 듯 했었다. 저녁이면 나는 카시나를 산보하곤 하였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꽃 없는 보볼리 동산을 거닐었다.

세빌랴에는 지랄라 근처에 회교 사원의 낡은 마당이 있다. 오렌지나무들이 여기저기 균형을 이루도록 자리잡고 서 있다. 그 나머지 빈 터에는 돌이 깔려 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엔 아주 조그만 그림자밖에 볼 수 없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네모진 마당이다.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아름다운지 그대에게 설명은 할 수 없다. 시외에는 철책을 둘러친 커다란 정원 속에서 열대식물들이 무수히 자라고 있다. 들어가진 않았지만 철책 너머로 들여다 보았다. 펭타드새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길들인 짐승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카자르에 관해서는 무슨 말을 그대에게 하였으면 좋을까? 페르시아처럼 꿈결같은 동산. 그대에게 말하고 있노라니 다른 어느 정원들보다도 그곳이 좋아진다. 하피즈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그곳을 생각한다.

 

술을 갖다 다오

옷에 얼룩칠을 하여 보고 싶구나.

나는 사랑에 취하여 비틀거리건만

사람들은 나를 불러 현자라 하기에.

 

길에는 분수들이 설치되어 있다. 길들은 대리석으로 포장되고, 미르타나무며 삼목들이 늘어서 있다. 좌우에는 대리석의 못이 있다---옛날 임금의 애인들이 목욕하던 곳이다. 거기에 보이는 꽃은 장미와 수선과 월계꽃 뿐이다. 정원 깊숙이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거기에는 뵐뵐 한 마리가 앉아 있음직했었다. 궁전 곁에 있는 저속한 취미의 못들은 조개로 만들어진 상들이 늘어 서 있는 뮌헨 왕궁의 마당을 연상케 한다. 어느 해 봄의 일이었지만, 뮌헨의 궁원에서 그칠 줄 모르는 군악대의 연주를 들으며 5월의 향초를 넣은 아이스크림을 먹은 일이 있었다. 우아한 품은 없어도 음악에 열중하는 청중. 꾀꼬리의 애절한 울음 소리에 황홀감이 느껴지는 저녁이다. 독일의 시처럼 그 노래는 나의 가슴을 녹였던 것이다. 황홀감이 너무 강렬해지면 가슴이 벅차져서 눈물없이 견디기가 어렵다. 그 정원에서 받은 황홀감은 그 시각에 내가 다른 데 있게 되었을지도 몰랐으리라는 생각을 하기가 거의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기온]이라는 것을 특히 즐길 줄 알게 된 것은 그해 여름의 일이다. 그러한 쾌감을 느끼기에는 눈꺼풀이 제일 적합하다. 언젠가 기차 안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그저 서늘한 바람의 촉감을 맛보면서 하룻밤을 지낸 일이 생각난다. 눈을 감는 것이었는데 잠자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그것]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더위는 숨막힐 지경이었고, 저녁이 되어 공기는 아직도 훈훈하였지만 그래도 나의 타는 듯한 눈꺼풀에는 서늘하게 물이 흐르는 것 같았었다.

 

그라나다에서는 제네랄리프 궁 테라스에 우거진 협죽도들이 꽃을 피우고 있지 않았다. 피자의 캄포 산토에도 꽃은 없었고 성 마르코스의 작은 수도원에도 장미꽃이 만발했으면 싶었건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몬테 핀치오를 가장 좋은 계절에 볼 수 있었다. 무더운 오후가 되면 사람들이 서늘한 맛을 찾아 그곳으로 모여드는 것이었다. 그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있던 나는 매일 그곳에 산보하였다. 병든 몸이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자연이 나의 육체 속에 배어드는 것 같았다. 신경장해의 탓도 있었겠지만 이따금 나의 육체에 한계를 느낄 수 없게 되곤 하였었다. 육체는 멀리까지 퍼져가곤 하였다. 어떤 때는 쾌락속에 잠겨 설탕덩어리처럼 송송하게 잔 구멍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녹아 버리는 것이었다. 내가 앉아 있는 돌걸상에서는 나에게 피로감을 주던 로마의 시가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보르게즈의 동산이 내려다보여 멀리 우람한 소나무들이 밑에서 하늘로 뻗쳐 나의 발과 같은 높이까지 다다라 있었다. 오오, 테라스여, 거기서 공간이 뻗어나가고 있는 테라스여! 오! 공중의 항해.........밤에 나는 파르네즈의 동산을 거닐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 숨겨진 폐허 위에 피어난 희한한 식물!

 

나폴리에는 둑처럼 바다에 잇달린 나지막한 공원들이 있고 거기에는 햇빛이 들어오고 있다.

니므에는 운하들 속에 맑은 물이 넘칠 듯이 흐르는 퐁테느 공원이 있다.

 

몽펠리애에는 식물원.

어느 날 저녁 앙부루아마즈와 함께 마치 아카데무스의 동산 속에서처럼 삼목으로 둘러싸인 낡은 무덤 위에 앉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장미 꽃잎을 씹으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다.

어느 날 밤 우리들은 페루 공원 기슭에서, 멀리 달 밑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를 보았다. 우리들 곁에서는 저수지에서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들려오고 흰 술로 몸을 두른 듯한 검은 백조들이 잔잔한 못 위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말타에서는 거류민 구역의 공원으로 책을 읽으러 갔었다. 치타 베키아에는 레몬나무의 아주 조그만 숲이 하나 있었다. 무르익은 레몬을 우리는 깨물어 먹었다. 처음에는 시어서 견딜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차츰 시원한 향기를 입 속에 남겨 주는 것이었다. 시라쿠사에서도 고대의 유물인 갱옥속에서 우리는 레몬을 깨물어 먹었었다. 헤이그의 공원에는 낯설어하는 것 같지도 않은 사슴들이 뛰놀고 있었다.

 

아브랑슈의 공원에서는 상 미셀 산이 보이고, 저녁에는 멀리 모래터가 불붙는 무슨 물질과도 같아 보인다. 매우 작은 도시지만 그 이름도 잊혀지고 만다. 그 공원을 다시 한 번 보고싶건만 다시는 찾아가 볼 길이 없다.

나는 모술의 공원들을 꿈꾼다. 거기에는 장미꽃이 만발하여 있다고 한다. 나스퓨르의 정원은 오마르가 노래하였고, 하피즈는 쉬라즈의 정원을 노래하였다. 우리는 나스퓨르의 정원을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비스크라의 우아르디 정원을 나는 안다. 목동들이 염소를 지키는 곳이다.

 

튜니스에 있는 정원은 묘지뿐이다. 알제리아의 식물원에서는(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종려나무들이 있다) 전에는 본일도 없었던 과실을 먹었다. 그리고 블리다에 관해서는, 나타나엘이여, 그대에게 무엇을 이야기했으면 좋을까?

 

아아! 사엘의 풀은 참으로 부드럽다. 그리고 오렌지나무의 꽃이며 그 그늘! 향기 그윽한 동산! 블리다여! 가련한 한 떨기 장미꽃! 이른 겨울에 나는 너를 잘못 보았었다. 너의 신성한 숲에는 봄이 되어도 변함없는 나뭇잎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너의 등나무도 덩굴나무도 불태우기 알맞은 장작 가지 같았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눈이 너에게로 가까이 날아왔었다. 방 안에서도 몸을 녹일 수 없었고 너의 비 내리는 동산에서는 더우기 그랬었다. 피히테의 <<과학설>>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금 종교적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 같은 심정을 억누를 길 없었다. 나는 온순하게 되었었다.

 

사람이란 자기의 슬픔에 인종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모든 것으로 미덕을 쌓아 보려고 했었다. 이제 나는 신발의 먼지를 털어 버렸다. 바람이 그 먼지를 어디로 싣고 갔는지 누가 알 수 있으랴? 내가 예언자처럼 방황하였던 사막의 먼지. 너무나 말라서 산산이 부서지던 돌멩이. 나의 발 밑에서 돌은 타는 듯 뜨거웠었다(태양이 엄청나게 그것을 달구었던 때문이다). 사엘의 풀밭에서 이제 나의 발이여 쉬라. 우리들의 모든 말이 사랑의 말이 되기를! 블리다여! 블리다여! 가련한 한 떨기 장미꽃! 나뭇잎과 꽃으로 가득 찬 따뜻하고 향기로운 너를 나는 보았다. 겨울의 눈은 이미 사라졌었다. 너의 신성한 정원에서는 흰 사원이 신비롭게 빛나고, 덩굴나무는 꽃 밑에서 휘어지고 있었다. 등나무가 엮어 놓은 화환 밑에 올리브나무가 자태를 감추고 있었다. 달콤한 공기가 오렌지꽃에서 풍기는 향기를 몰아 오고 가냘픈 귤나무들조차 향기로왔다. 추위로부터 해방된 유칼립터스나무들은 높이 솟은 가지에서 낡은 껍질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낡아빠지도록 나무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 태양 때문에 소용없게 된 옷처럼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겨울이 아니면 값 없는 나의 낡은 모랄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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