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illiam Godward (1861~1922), The Fish pond (1899)
회화와 예술에 지역적 특성이 없지 않으나
그렇다고 예술을 지역적 특성만으로 한정지어 볼 것도 아닐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고드워드의 윗 그림은 영국이건 스코틀랜드건 어디에 비추어도 이국적인 느낌이다.
로마나 아테네 정도의 르네상스 회화라면 훨씬 더 수긍이 갈 분위기와 배경, 인물이다.
아닌게 아니라 옛 로마나 아테네 풍으로 묘사된 작품에서 짐작할 수 있듯
고드워드는 "고대인들이 누렸던 쾌락적 생활상을 묘사함으로써,
당시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했던 현실 도피적인 상상을 재현하고자 했을 뿐"이란다.
급속하게 팽창된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빅토리아 상류사회의
탐미적 예술 취향에 대해서는 시인 브라우닝도 여러 작품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런 경향과 더불어 당대 사회의 사회적 공리주의에 대한 경도는
예술가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결국 과도한 낭만적 성향을 지닌
유미주의 예술론으로 향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고드워드의 이 작품도 그런 경향의 한 표현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까.
갈등으로 가득한 혼란스러운 사회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이상적 공간을 통해
고드워드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가능한 세계였던 것이며,
도달할 수 있는 세계였을까.
저 여인의 우아한 자태와
물고기가 유유히 헤엄치는 아름다운 정원과 화려한 꽃들은
외부의 그 소음 없이 존재하는 세계일 수 있을까.
고드워드의 상상의 세계는 아름답게 완성되었으나
정지된 그림의 전후를 흐르는 역사는
우리를 그림 안에만 머물지 못하게 한다....
Edward Stott (1855~1918), The Watering place (1898)
낭만적 상상은 완벽하게 꾸며진 정원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의 공간도 환상과 낭만적 상상의 중요한 매개이자 소재이다.
윗 그림 속 소녀는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답고
은은하나 환한 햇살을 담은 물웅덩이와
연녹색의 나뭇잎을 중심으로 하는 소녀 주변의 색채는
완벽한 평화로움을 부여한다.
소녀의 모습에서 노동의 지난함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차분한 여유로움이다.
소들은 얼룩 없이 깨끗하다.
스콧의 리얼리즘은 물리적 리얼리즘보다는
심리적 리얼리즘과의 친연성이 두드러진 것 같다.
이미지의 차용 공간은 자연이었으나
작품의 생성 과정에서는 현실 이미지보다는
그의 '상상의 채색'이 더욱 큰 작용을 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니 그의 상상이
"낮 동안의 열기와 고된 노동이 지나간 뒤 찾아오는
평화롭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표현"했다는
지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상상이 현실의 질곡을 까맣게 망각하고
상상 속에서 거주하는 것만이 아니기를 바랄 뿐.
Thomas Fewderick Mason Sheard (1866~1921), Harvesters resting (1898)
노동 공간의 상상적 아름다움은 쉬어드의 그림에서도 똑같이 표현된다.
추수를 하던 농부들의 휴식은 달콤해보인다.
그들이 들이키는, 럼주이건 포도주건, 술은 그 맛이 화폭 밖으로 느껴질 정도고
볏짚단 위에 부서지는 햇살과 한가한 풍경,
너무도 여유로운 이들의 자세에서 노동 중의 휴식만큼이나
소풍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질 정도로
화면은 정적이고 따스하다.
처음 그림 앞에 섰을 때는 화폭 가득한 환한 밝음과 여유 때문에
다시 그림 앞에 섰을 때도 화폭 가득한 환한 밝음과 여유 때문에, 그리고
그 환한 밝음과 여유를 한참 쳐다보다 느끼게 되는 뭔가 생경함때문에
오래오래 그림을 보게 된다.
Henry Herbert La Thangue (1859~1929), Packing cherries (1923)
라 생의 이 그림을 보는데 내 앞에 와서 선 커플 가운데 여성이 말했다.
"저 그림, 벽의 햇살이 뜨거워."
그랬다. 그림 속 벽에 부서지는 햇살은 뜨거웠다.
체리는 붉고 체리를 담는 여인은 말이 없다.
붉디 붉은 체리와 집 담벼락에 부서지는 강렬한 햇살,
그리고 그늘 속의 여인.
빛의 찬란함과 체리의 붉은 빛이
체리를 줍는 저 여인의 마음속에 자리한
빛과 색은 아닐까.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다는
"힘들게 일하고 있는 여인에 대한 연민" 이
그 빛과 체리로 형상화된 것일까.
Edward Stott (1855~1918), The Ferry (1887)
스콧의 이 그림 앞에서 섰을 때 제일 먼저 느껴진 것은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보트 안 두 아이의 까만 눈동자였다.
두 아이는 모두 웃고 있다.
사내아이는 눈에,
여자아이는 입에 웃음이 더 많이 걸려 있다.
나머지 인물들과 근, 원경의 배경들은 두 아이를 위한 셋팅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두 아이는 전체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녹색조의 전체적인 톤 가운데 아이들의 홍조를 머금은 듯한
하얗고 발그스레한 뺨, 얼굴과 입술이 도드라진다.
아이들의 할아버지일까 아니면 사공일까, 나룻배를 젓는 노인의 코 아래에도
미소가 어려있다.
호수의 수련과 멀리 보이는 농가 앞의 말들과 오리,
물 길어가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한갓진 농촌의 일상의 한 순간이 평화롭게 담겨 있다.
앞에서 본 물먹이터의 소녀를 그린 환상적인 그림과 이 그림은
녹색의 색조가 공통되기는 하지만 나머지는 다른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이 있는 모습 그대로의 한 순간을 담아내려고 했다면
앞에서 본 스콧의 물먹이 소녀의 그림에는 실제 모습보다
작가의 환상과 상상이 훨씬 더 강렬한 빛으로 채색되어 담긴 것이 느껴진다.
이 작가에 대한 대한 설명에 따르면,
스콧의 이 작품은,
빛과 대기의 효과를 정확하게 포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야외에서 작업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른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그 다음부터 그는 야외에서는 스케치만 하고
작품의 완성은 작업실에서 했다고 한다.
그 차이, 현실의 빛과 모습과
작가의 상상 속 빛과 모습의 차이가
두 그림 사이의 거리를 형성한다.
그 둘 사이의 거리는 가깝고도 멀어 보인다,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그러하듯....
Frederick William Jackson (1859~1918), A Welcom visitor (1893)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바닷일을 하는 시아버지에게 며느리와 손녀가 찾아온 것이겠다.
오늘 바닷일은 아들이 나가고 대신 어구를 손질하고 배를 수선하는 일을 하며
평소보다는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던 할아버지에게
손녀의 방문은 잠깐의 휴식 이상의 즐거움을 줄 것이다.
이제 곧 아이는 엄마의 손을 떠나
팔을 벌리고 안으려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에게로
아장아장 걸어갈 것이다.
파도는 잔잔하고 갈매기는 한가롭게 날며
풀들은 따사로운 손길처럼 부드럽게 피어있다.
힘든 우리 삶의 나날들은
이런 순간순간의 반가운 방문들이 있어
견뎌가는 것 아닐까....
John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Windy Day (1808~1809)
풍경 속에 건물이 중요한 오브제로 자리한 이 그림 속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화면의 우중앙에 우뚝솟은 탑의 도드라짐이다.
그러나 그림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바람에 어지럽게 흩날리며 곧 비를 뿌려댈 것 같은 하늘의 구름이 눈에 들어오고,
또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면 제일 원경으로 처리된 숲과 정원을 갖춘 저택이 눈에 들어오고,
또 한참을 들여다보면 바로 화폭의 제일 앞에서 거칠게 일렁이는 파도와
그 파도 위에 떠 있는 배들의 바람 머금은 돛들이 들어오고,
제일 앞에 있는 배의 놀라울만큼 수평을 유지한 모습이 들어온다.
일렁이는 파도 위에서도 저 배는 거의 일직선으로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미치자 이미 다른 그림을 보며 앞서 간 아이들을 불러
이 그림에서 이상한 점이 대해 물었을 때
아이들도 같은 대답이었다.
"배가 안 움직이는 것 같아, 제목은 바람부는 날인데...."
비를 머금은 채 회색 빛으로, 그리고 곧 먹장 구름으로 변해갈
뒤엉킨 구름 가득한 하늘과
그 사이로 빛을 받아 도드라지는 멀리 저택과
가까운 배들과 탑, 그리고 이미 먹구름이 들이친 것 같은 물결의 검은 색이
이 그림의 배경인 체셔 지방의 변화많은 어느 한 날의
바람 가득한 날을 잡아 두었다.
Edward Atkinson Hornel (1864~1933), A Summer idyll (1908)
동화 속 세계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풀과 나무에 둘러쌓여 자연 속에 하나된 듯한 천진난만한 표정의
무당벌레를 잡은 소녀들은 동화속 요정들 같다.
분위기만이 아니라 독특한 색감과 처리 방법 또한 색다른 느낌을 준다.
화가인 에킨슨은 유화를 먼저 두껍게 바른 다음 그것을 벗겨내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방식을 통해 에킨슨은
"입체감을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평면적으로 보이도록 애쓰고"하고
그것을 통해 "기존의 관습적인 회화의 원근법을 뒤엎고자" 했다.
소녀와 자연이 하나된 것 같은 것은
내용만이 아니라 표현방식에서도 그랬던 것이다.
Stanley Spenser (1891~1959), Bellrope Meadow, Cookham (1936)
한 장면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그림.
철조망까지도 빠트리지 않고 세밀하게 묘사한 데서 작가의 태도가 드러난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자구보다보면 왠지 몽환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는 그림.
스펜서는 자연풍경의 사실적 표현을 중시하면서 자연 자체에 목적을 둔,
순수하게 풍경을 담은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Pierre Edouard Frere (1819~1886), Snowballing (1861)
이 그림을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지 않기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초저기 어디쯤에서 어릴 적 친구들과 하굣길에 눈싸움을 하던
자기 모습을 찾으려 두리번거려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은 느낌의 그림.
그림 속의 아이들은 모두 살아있다.
그림을 보면서 초등학교 시절 아이들이 했던 놀이 한가지를 떠올리며 웃었다.
이 그림이 교과서에 실렸다면 무조건 이겼을 놀이.
그때 우리는 교과서를 넘겨 사람이 많이 나오는 쪽이 이기는 놀이를 하곤 했다.
이 그림이 실려있는 페이지를 넘긴 아이라면 무조건 이겼을 것.
그리을 보는데 문득, 그 생각이 났다....
Henri Gaston Darien (1864~1926), Quai Malaquais, Paris.
전시장의 맨 마지막 그림.
그림 앞에 발자국 모양이 두 군데 표시되어 있다.
그 앞에 서면 마치 저 거리를 걷고 있는 것 같은 시각적 느낌을 주는 각도의 지점에.
그 지점에 서면 그림이 아니라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할 수도 있다,
물론 '불신의 자발적 유예'(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를 기꺼이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을 때 말이다.
시공간을 초월해 저 거리를 걷고 있는 그림 속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걷고 있는 느낌을 잠시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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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더러 길게 이어지는 행렬에,
또 계속 이어지는 적지 않은 그림에 조금씩 힘들어 하는 기색도 보였다.
그러나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저 그림들 안으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한 번쯤은 더 가도 괜찮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걷는 시간도 언젠가 이렇게 기억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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