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cropper's family, Alabama, 1936.
사진의 크기가 결정하는 아우라가 있다.
옆에 나란히 걸린 에반스의 원 사진을 디지털 판본으로 확대한 사진 앞에서
나는 원판의 작은 크기가 감추어버릴 수도 있었던 부분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사진을 보자.
이 가족들은 일하던 모습 그대로 에반스의 부탁을 받고 이 사진을 위해 모였으리라. 오른편 아래 갈라진 틈 사이로 보이는 맨 바닥은 이 집이 맨 땅 위에 나무판자를 이어 지은 집 임을 보여준다. 이보다 훨씬 전 노예들의 거처도 그랬다는 기록을 기억한다. 1930년대 이들 소작인들과 해방 전 노예들의 처지가 그리 많이 달랐겠는가. 부인이 걸터 앉은 낡은 침대와 사진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카메라가 선 자리 어딘가에 있을 이들의 식기들이 이 집 가재도구의 전부일 것이다. 식구들이 입고 있는 옷이 이들의 제일 훌륭한 복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옷이 그들의 옷장 어디에 숨겨져 있다고 믿기도 어렵다.
할머니를 제외하면 누구도 신발을 신지 않았다. 신발을 신고 안 신고, 큰 차이가 있을까. 다 해어져 너덜너덜해진 할머니의 신발에는 이들의 삶의 지난함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할머니와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 혹은 그 전 세대의 누군가가 계약 노동을 통해 대서양을 건너 이주해 왔을 것이다. 그후로 최소한 두 세대는 지났을 그들의 삶은 이주했을 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고, 한 세대가 더 지난다해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판지로 이어 지은 집 바닥과 뒷면 색 바래 어두운 나무 벽면의 검은 색은 이들 가족의 현재와 미래가 밝지 않음을 보여준다.
렌즈를 향하는 가족들의 시선과 그 속에 담긴 표정은 강렬하다. 이 사진을 자세히 보는 누구라도 이들 하나하나의 시선에서, 그 눈동자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한번 그 눈동자와 마주치자 나는 그 호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강렬한 부름을 받은 것처럼 그 시선에 빠졌다.
어른들의 시선은 모두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반면, 아이들은 모두 카메라의 시선을 비켜나 있거나 아예 외면하고 있다. 어른들은 지금 자기 앞의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반면,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카메라 렌즈는 무엇인가. 거울의 다른 모습이다. 거울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본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여기 있는 자기를 본다는 것이다.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라면 더욱. 사진 속 어른들이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들의 현실에 대한 적극적 인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달리 보자면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확고한 인식과 순응의 결과로 읽을 수도 있다. 반면, 아이들에게 현실은 아직 그렇지 않은 것이다. 특히 소녀이 시선이 내 눈길을 끈 이유가 그것이다. 각각의 시선을 보자.
할머니의 시선에는 한 세대, 어쩌면 그 전 세대부터 내려온 노동의 지난함과 현재의 삶보다 더 나은 것을 기대할 수 없는, 혹은 수많은 기대들이 좌절되는 경험을 겪은 노인 특유의 냉정함과 얼마간의 냉소가 담겨있는 것 같다. 렌즈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의심과 불만이 없지 않다. 꼭 맞잡은 두 손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금방이라도 드러낼 마음을 다잡기라도 하듯 힘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지난한 노동도 이 할머니가 지니고 있는 자존감을 해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할머니가 지닌 앞치마 가운데 가장 양호한 상태인 것만은 분명한 앞치마를 걸치고 다 해지긴 했으나 맨발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은 그게 무엇이건 아직 그 앞에 굴하지 않은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은 할머니의 의지의 반영일 것이다. 작은 체구에 단호하게 담긴 강단도 강렬하게 느껴진다. 어찌 안 그러겠는가. 그로부터 저기 다음 세대들이 저리 존재하는 것을.
각각 아이를 안고 앞에 세우고 정면을 응시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선은 같으나 다르다. 망설임과 적대감 없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마치 렌즈 속으로 달려들 듯 강렬하게 응시하는 두 사람에게서 아직 쓰러질 기색은 보이지 않은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 다가오더라도 그들은 품에 안은 아기와 앞에 세운 아들을 위해 견뎌낼 것이다. 아버지의 깊은 시선에는 피곤에 지친 기색보다는 자신을 향한 성찰의 기색이 더 또렷해 보이고, 수유하듯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시선에는 아직 열정이 가득하다. 간단없는 노동으로 검게 그을리고 투박해진 둘의 발은 이 가정을 받치는 든든한 기둥이다. 둘의 노동은 그러므로 당당하고, 그 발은 아름답다 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투박한 발은 거리낌 없이 앞으로 쑥 나와 있는 반면, 어머니의 발은 수줍게 뒤로 숨어 들고 오무렸다. 가족을 위한 그들의 노동은 숭고하나 아름답지만 어머니는 또한 여성이다. 노동은 부끄럽지 않으나 투박해진 발을 감추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닌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렌즈가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향하고 있다. 엄마 품에 안겨 자는 아기,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금방이라도 아버지의 손을 벗어나 뛰어나갈 것 같은 사내 아이, 그리고 침대 가장자리에 수줍은 듯 단호한 표정으로 서 있는 큰 딸. 나는 이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엄마 품의 아기와 아빠 앞의 사내아이에게 아직 자의식은 없다. 아기는 물론이고 사내아이는 지금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그저 이상한 기계 앞에 붙들려 서 있을 뿐. 그러나 여자 아이는 다르다. 이 소녀에게는 이미 자기 세계가 또렷하게 들어와 있다. 소녀에게 지금 이 세계는 견디기 쉽지 않은 것일 뿐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소녀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작은 사진으로 보면 카메라의 정면을 응시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소녀의 시선은 다른 공간을 향하고 있다. 지금 소녀가 대면하고 있는 현실은 인정하기에는 너무 가혹하고 그렇다고 외면할 수는 없는 이중의 족쇄같을 것이다. 소녀는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다. 소녀의 시선이, 소녀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 다른 어떤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소녀는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날 수 없다. 소녀의 그 갈등은 카메라를 향하지 않은 시선은 물론 비스듬히 침대에 기댄 자세, 그리고 어찌할 수 없이 힘주어 오무린 발가락들에 그대로 담겨있다. 이 소녀가 시스터 캐리 같은 존재가 될 지, 아니면 [분노의 포도]의 로즈 오브 샤론 같은 존재가 될지, 아직은 모를 일이나, 분명한 것은 이 소녀의 마음은 현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표정의 단호함과 결의에 어두운 세계의 빛이 없다는 것이다. 소녀의 눈빛은 깊고 단정하고 우수에 차 있기까지 하다. 저런 시선으로, 발가락을 저렇게 오무리며 자신의 망설임과 결의를 드러내는 사람이 악한 길을 걸을 리 없다. 소녀는 뱀이 가는 길을 가지는 않을 것이다.
에반스의 이 사진은 분명하게 현재를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확실하게 우리로 하여금 그 다음 시간을 이야기 하게도 한다. 할머니의 시선에서 불안하고 회의적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면, 부모의 시선에는 품에 안은 아이들을 위해 지금 여기 확고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이들의 단호함이 담겨있다. 반면, 소녀에게 현재는 아직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엇이다. 소녀의 마음은 지금 여기를 떠나 다음, 다른 시간, 다른 공간으로 향해 있다. 에반스가 그것을 보여주려 했는지는 모른다. 당시 에반스가 이 작업을 할 때, 목표로 했던 것은, 당시 이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의도가 무엇이었건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사진에 담긴 가족들 한명 한명과 그들의 모습 전체를 통해 우리가 듣고 보게 되는 이야기는 그가 찍은 한 장의 사진, 그가 추구했던 '서정적 리얼리즘'(Lyric realism)의 완벽한 결과물 때문이라는 것 말이다. 사진은 현재를 결박시켜 박제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질 수 있는 그 한 순간을 담아 영원하게 한다. 무릇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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