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dailylife

터너에서 인상주의까지 - 영국 근대회화전(1)

그림자세상 2010. 7. 24. 22:54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터너에서 인상주의까지 - 영국 근대회화전]에 다녀왔다.

시작한지 한달이 지났는데도

엊그제의 퓰리처 수상 사진전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로

전시장이 비좁을 정도.

주말과 방학, '인상주의' 때문이었을까?

아마 포스터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이 전시를 알리던 포스터의 바로 그 작품

 

George Clausen(1852~1944), Srping morning, Haverstock hill. (1881)

 

그림의 포커스는 화면 제일 앞의 소녀와 여인이지만

화가는 서로 다른 계층의 인물들을 한 화면에 모두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도 서로를 응시하지 않는다.

모두 자기 자신의 관심사만 응시하거나 화가의 시선만을 응시할 뿐.

19세기 말, 서로 다른 계층들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그들의 시선은 서로에게서 멀어 보인다.

뒤로 보이는 꽃파는 여인에게서 방금 꽃을 산

소녀와 함께 걷는 여인의 장례식을 향하는 듯한

짙은 검은 빛의 복장은 여인의 상기된 붉은 뺨과

아름다운 얼굴과 역설적인 조화를 이룬다.

슬픔도 여인의 화사한 아름다움을 감추지 못한다. 

아이의 표정 또한 숙연하다. 

슬픔 속에서도 여인과 아이의 환하고 붉게 상기된 얼굴과

여인의 밝은 스카프와 손에 든 꽃,

아이의 붉은 빛 스카프 장식은

다른 인물들의 회색빛 칙칙함과 대조된다.

 

왼쪽 벤취에 앉은 여인의 넋잃은 표정과 무기력한 자세 또한 

화면 중앙의 여인의 슬픔과 유사한 무엇을 표현하는 듯하고

뒤에서 꽃바구니를 들고 선 꽃파는 부인 역시 밝은 표정은 아니다. 

화면 오른쪽 끝에서 이곳을 응시하는 노동자의 어두운 얼굴 또한 예외는 아니다. 

모두는 무언가 모를 슬픔과 불안을 안고 있는 것 같다.

 

그 가운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인과 아이는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그 둘을 스쳐 지나자마자 뒤돌아 본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서로 엇나간 길을 가고 있다. 

이 여인과 소녀가 향해 가는 세계와

화가에게 시선을 향한,

오른편 노동자들이 다듬고 건설하는 포도의 세계,

그 두 세계의 엇나감과 공존이,

당대 영국의 한 순간이

화가 조지 클라우스가 담아낸 화폭 안에 담긴 듯하다.  

그러나 그림을 보는 내내 포커스는

지나가는 여인과 아이에게 강렬하게 남아

나도 모르게 자꾸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Glen Birnham (1891).

 

라파엘 전파의 일원이었다는 밀레이는 실제로는 초상화가로 더 유명했다고 한다.

풍경화는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다듬는 치유력(Healing power)의 매개물이기도 했다고.

존 러스킨의 초대로 스코틀랜드를 방문하게 된 밀레이는

존 러스킨의 부인었다가 이혼후 자신의 부인이 된

여인의 고향이기도 한 스코들랜드의 자연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림의 소재가 된 버넘 주변 마을에 대한 애정이 강했던 그였다고 하는데,

이 그림은 그가 그린 버넘 지방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그림 속 겨울을 배경으로한 길과 수풀과 나무들에서는

차가움보다는 정감이 묻어나고  

마치 삶의 여정 같이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가는 

여인의 등돌린 걸음은

버넘 협곡으로 향하고 있지만,

화가의 시선은 그런 여인과 끝까지 함께 가지 못하고

뒤에서 아쉬운 눈길로 머물러 있는 듯 하다.

그림 속 저 여인의 걸음을 따라 버넘 협곡으로 갈 수 없는

혹은 갈 수 없게 될 화가 자신의 슬픔과 두려움이

저 여인의 뒷모습에 투영된 것은 아닐까....         

 

 

자연이 어찌 한 모습이기만 할 것인가.

자연은 저처럼 애틋한 마음의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자연은 또한 두려움으로 경외감으로 덮쳐오기도 하고,

은근한 관조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은

게나 예나 다를 바 없는 것.

John Linnell(1972~1882), The Rising of the River (1857)

 

린넬에게 자연은 두려움의 존재였던 것 같다.

보라, 하늘을  온통 뒤덮은 먹장 구름과 두려울만큼 우뚝 솟은 위압적인 나무와

나무들을 쓰러뜨리고 격렬하게 굽이치는 강물을,

왜소하고 무기력하게 피하는 인간의 모습을!

얼마나 더 많은 큰물을 저 먹장구름은 뿌려낼 것이며

나무는 소리치며 흔들릴 것인가.

인간들은 또 얼마나 더 두려움에 차

자연의 포효 앞에 공포를 느낄 것인가.

 

자연이 우리에게 영혼의 치유력을 부여하는 것 못지 않게

인간의 죄의식에 대한 신의 징벌의 두려움을 표상하는 매개체이기도 한 것이라면,

린넬이 보는 자연은 그런 자연의 모습에 가까운 것 같다. 

 

두려워하라!

두려워하라!

그렇게 이 그림은 외치는 것 같다. 

 

 

반면, 이 그림 속 자연은 분노보다는 평온함의 표상이다.

 

William Joseph J. C. Bond (1833~1928), Pond with yellow irises. 

 

눈앞의 노란 붓꽃과 하늘 담은 연못도,

바람에 흔들려 어지럽게 이리저리 흐트러진 것 같아도

잠시 후면 차분한 호수와 연못과 함께 하는 평온한 들과 연못으로 돌아올 숲들도,

세찬 바람에 제법 많이 흔들리며 멀리서도 어지러운 듯 보이지만 두려움보다는

든든한 그늘을 줄 것 같은 멀리 보이는 나무숲도,

그만큼 멀리 원경으로 잡힌 밭을 가는 소와 농꾼도,

모두 서로 자기 자리에서 편안하게 서로를 기대고 있는

그런 존재들이다.

화폭 앞에 앉은 화가의 시선에도

평온함과 따뜻함이 흘렀을 것이다.  

 

 

바로 위에서 위협과 두려움에 가득찬 자연의 모습을 담았던 린넬에게도

자연은 따뜻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아래 그림을 보자.

 

John Linnell (1792~1882), Crossing the Brook (1849)

마을에 나갔던 가족이 돌아오는 길,

비가 내린 뒤인지 마차가 다니던 길에 개울이 생겼다.

산 한켠은 흙들이 유실된 채 속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 길은 이미 여러 대의 마차가 지나간 흔적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위험한 곳은 아니다.

옆길에 바구니를 든 여인도 무언가를 짊어진 촌부에게도

빨간 통을 들고 있는 금발의 소녀에게도

장난스레 뛰는 검은 털북숭이 개에게도

보이는 것은 일상의 평온함이다.

마차 위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비 오고 갠 뒤 하늘의 구름은 여전하지만

하늘은 회색에서 푸른 빛으로 바뀌어 가고 있고

아마도 물에 휩쓸려 유실된 것같은

비탈길 옆 드러난 흙의 속살에 비치는 햇살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나무들은 기울었고 더러 뿌리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색감과 질감으로

마차 위의 가족들과 옆 사람들을 안정감 있게 보호하듯 감싸 안고 있는 모양새다.

소실점으로 이어지는 먼 데까지 구도는 안정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색채는 원경에서부터 점점 더 밝아져 그림의 전면부는 황금빛을 띠고 있다. 

익숙한 마을길로 들어와 푸근함 속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림 전체를 아우르는 안정감 있는 구도와 환한 색채로 표현되고 있다. 

자연은 이들과 하나되어 그들 곁에 있다. 

 

이 시기의 린넬에 대해 그의 전기를 쓴 작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레드힐에 정착한 이후로 린넬은 자연 속에 완전히 묻혀 지냈으며,

그의 모든 작품들은 바로 이 시기에 그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양 떼에게 풀을 먹이는 양치기처럼 

그는 자연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으며,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작품 속에 담아냈다. 

마치 자연의 절친한 친구이자 헌신적인 연인처럼,

자연의 모든 현상을 관찰했다."  (도록, 96쪽)    

 

그런 린넬의 마음과 생활이 이 그림에 그대로 담긴 듯 하다.

 

보는 대로 느끼고, 느끼는 대로 본다.

마음 가는대로 붓이 가고,

붓 가는 대로 마음도 옮겨간다.

 

그러니,

 

마음이 그림이요, 그림이 마음이다.

마음이 인생이요, 인생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