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dailylife

작고 꾸준한 보폭으로 오래 멀리 걷기에 대하여(5)

그림자세상 2010. 7. 16. 12:41

지난 월요일, 나갔다 들어오는 길이었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아파트 안 예의 그 벤취 앞을 지나는데 동과 동 사이로

한결같은 모습으로 걷는 연습을 하고 계시는 어르신을 뵐 수 있었다.

멀리서 한참 그분이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았다. 

앞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발 아래 땅만 바라보고 한발 한반 걸어오시는 모습을.... 

 

 

죄송스런 일이라 생각했지만 서서 이렇게 다가오실 때까지 보면서 담았다....

어르신이 벤취를 지나 다시 걸음을 옮기실 때 내가 어르신을 계속 보고있으니

벤취에 앉아계시던 한분이 궁금해하는 눈으로 나를 보셨다.

낯이 익은 분, 이 분이 걷는 연습을 하실 때면 언제나 그 벤취에서 뵐 수 있었던 분, 부인이셨다.

인사를 드리고, 말씀을 드렸다.

어르신이 걷는 연습을 하시는 것을 뵌 지가 오래 되었다.

기억으로는 2년은 훌쩍 넘은 것 같았는데, 아침에 나갈 때나 저녁에 들어올 때 뵈면서

더 좋아지시기를, 오늘은 덜 힘들게 걸으시기를, 빌었다고,

요즘은 걸음이 많이 빨라지신 것 같아 마음이 좋았다고,

그래서 기회가 되면 꼭 말씀드리고 싶었다고, 많이 좋아지신 것 같다고, 더 좋아지실 것 같다고,

오늘은 마침 어르신께서 운동하시는 시간에 뵐 수 있어서 그 말씀 드리고 싶었다고....

그렇게 반갑고 고마워 하실 수가 없었다.

한 시간 가까이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어르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2년 정도 뵌 것 같은데, 우리와 같이 처음 입주하실 때 오셨다시며,

어느날 운동을 마치고 잠깐 쉰다고 누운 어르신이 거동을 못해 응급실에 실려간 이야기부터,

한전을 다니신 이야기, 술, 담배 안 하시고 건강하셨던 이야기,

거의 회복불능이라는 판단을 받았을 만큼 심했던 어르신의 초기 발병이야기, 친구분들 이야기,

운동을 즐겨 하셨던 이야기, 자식들 이야기,

지금은 서울에서 다른 일을 하는 아드님이 포항제철에도 다녔다는 이야기,

집에서의 어르신 이야기, 힘든 병 이야기, 복지관에서의 글쓰는 이야기,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어르신과 가족분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나도 아버님이 혈압으로 한동안 거동이 불편하시다가 장고를 배우고 나아지신 이야기,

풍이 왔던 장인 어른이 회복되어 지금은 예전과 변함없이 건강하게 생활하시는 이야기를 전하며,

처음 뵈었을 때보다 정말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서 지나면서 뵐 때마다 늘 더 좋아지시겠다,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하게 운동을 하시니 더욱 그러실 것이다,

죄송한 말씀이긴 하지만 제가 어르신 뵌 이야기를 제 공간에 했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아시는 많은 분들이 어르신의 회복을 빌어주실 것이다, 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찮으신 어르신 때문에 마음 고생이 없지 않을 터이나

단정하고 꿋꿋하며 어르신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분이셨다.

주변에 있던 분들과 잘 아시는 듯 많은 분들도 옆에 앉은 어르신을 걱정해주셨다. 

매일 오전 오후 이 동을 다섯 바퀴씩 걷는다고 하셨다.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그 시간의 운동을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고도 하셨다.

올라간 채 뻗뻗해진 손을 펼 수 있는 게 지금 어르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라 하셨다.

모자를 벋고 옆에 앉아 힘들게 숨을 몰아쉬시는 어르신은 거의 말씀이 없으셨지만

부인께서 내 이야기를 하며 말씀을 드리고 나도 처음 뵈었을 때보다 너무 많이 좋아지신 것 같다고,

곧 더 잘 걸으시고 좋아지실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자

조금은 쑥스럽게 그러나 환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셨다.

어르신도 웃고 부인되시는 분도 웃고 벤취 아래 앉아 계시던 어르신들도 웃고 나도 웃었다.

어르신은 한 바퀴 더 걸으신다며 일어나 걸음을 옮기셨다.

 

나는 언제쯤 어르신의 저 작고 좁고 불안정한 보폭의 걸음이

조금 더 안정되고 빠른 걸음이 되고 지팡이가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실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르신의 작고 꾸준하게 오래 걷는 걸음이 가져올 앞으로의 시간에 대해서는 믿음을 갖는다.

언젠가 어르신의 작고 꾸준하고 오래 걷는 걸음은 그 걸어간 시간의 흔적을 담아 어르신을 걷게 해 줄 것이다.

 

우리도 모두 걷고 있다.

우리의 모든 걸음도 어르신의 그 걸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하루하루의 걸음 또한 어르신의 그 걸음처럼 작은 보폭의 힘들고 불편한 걸음일 때가 많다.

그래도 우리는 걷는다. 걸어야 한다, 작고 힘든 걸음이지만 꾸준하게.

더 당당하게 제대로 걸을 수 있는 걸음을 옮길 수 있을 때까지 꾸준하게 오래.

 

아침 저녁 드문드문 오가며 뵈었던 어르신의 작고 꾸준한 걸음에

내 눈이 마음에 그렇게 다가갔던 것은

어르신의 걸음에서 내가, 우리의 걸음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제 아침, 여전히 어르신은 발 아래를 보고 걷고 계셨다.

버스 정거장을 향하는 사람들과 나도 어르신의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작은 보폭으로, 꾸준하고 한결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