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dailylife

작고 꾸준한 보폭으로 오래 멀리 걷기에 대하여(4)

그림자세상 2010. 7. 3. 12:26

지난 금요일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들어오는데 아파트 입구의 그 자리에 할아버님이 앉아 있었다.

몇몇의 할머님 아주머니들과 아이들, 그리고 늘 그곳에 자리를 잡고 계신 야쿠르트 아주머니들과 함께.

할머님들은 더러 환하게 웃으시기도 하고

손에 쥔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기도 하시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고

아이들은 가만있지 못하고 벤취 주위를 빙빙 잰걸음으로 돌며 놀고 있었다.

야쿠르트 아주머니는 지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더러는 눈웃음으로 더러는 소리쳐 인사를 하며 아는 체를 했고

유모차를 끌고가던 아기 엄마들은 그 앞에 멈춰서

야쿠르트 박스 속의 물건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유모차에 앉은 어떤 아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채 입을 벌리고 잠들어 있었고

어떤 아기는 엄마가 유모차를 두고 야쿠르트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에도

옹알거리며 엄마를 찾았다.

할머니들이 아기들을 두고 

"애기 참 시원하게 생겼다." "고놈 참 야무져보이네" "한잠 폭 들었네. 제일 좋을 때다"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나는 벤취 한켠에 앉아 할아버지를 지켜보았다.

주변이 그렇게 소란스러웠지만 할아버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파란 운동용 조끼를 입고 지팡이를 벤취에 옆으로 기대 놓은 채

고개를 숙이고 마치 조는 듯한 모습으로, 그러나 조는 것은 아니었다,

눈을 뜨고 그저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의 걷기를 마치고 쉬는 것 같았다.

나는 할아버지와 서너 사람 떨어진 자리에서 할아버지를 보았다.

늘 모자를 쓰고 있던 할아버지의 벗은 머리는 양 옆으로 M자 형으로 성겼고

자그맣고 귀여운 코는 만화영화의 장난꾸러기 할아버지 캐릭터를 떠오르게 했다.

할아버지는 피곤해 보였다.

가만히 바닥을 응시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이따끔씩 손을 만지작거리거나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쪽을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특별히 할아버지에게 할 말이 있지는 않았지만 좀 더 가까이 앉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안고

하릴없이 전화기를 만지며 이따끔씩 할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다시 할아버지가 일어나 걷는 연습을 하시기를 바랬다.

그냥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땅을 보며 걷는, 걷는 연습을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바람은 아파트 벽 옆 짙은 녹색 나뭇잎 위로 잔잔하게 흘렀고

가려진 햇살 덕에 시원하게 그늘진 벤취 주변의 블럭 위로 겨우 한뼘 정도 될까,

사선으로 비껴든 햇살이 환하게 부서졌다.

이른 퇴근을 한 아버지들이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오는 모습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정장 차림 사람들의 가벼운 발걸음이

사람들을 지나 작은 울림을 울리며 멀어져갔다. 

야쿠르트 아줌마도 가방을 닫고 움직일 준비를 하고 

벤취 주위를 맴돌며 까르르거리던 아이들도 놀이터의 그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기 엄마들은 아이들이 탄 유모차를 끌고 집으로 들어가고

할머니들의 수다도 끝이 났다.

할아버지는 그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꽤 긴 시간이었지만 할아버지는 다시 걷는 연습을 하지 않았다.

나는 까닭없이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음악을 듣다말다 하며

그렇게 벤취에 앉아있었다.

그러나 끝내 할아버지는 가만히 바닥을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으셨고

나는 일어섰다.

조금 더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래야할까.

할아버지는 걷는 연습을 하셨던 것이다.

그건 내가 보거나 안 보거나 상관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에게 그 일은 규칙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될 숨 쉬는 것과도 같은 것.

내가 그 할아버지에 관해 생각한다는 이유로 그분이 내게 특별한 분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특별히 무엇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벤취에 그렇게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보고

나는 그분이 걷는, 걷는 연습을 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요일 오후, 내가 다시 본 그 할아버지는 그렇게 끝내 다시 걷는 연습을 하지 않았고,

나는 일어서 돌아왔다.

다음에 다시 그런 기회가 생기면

그 할아버지께 가벼운 눈인사와 한마디 인사도 전해야겠다,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