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숲은 죽지 않는다 - 강원도 고성 (2)

그림자세상 2010. 7. 17. 00:33

  숲은 죽음, 단절, 혹은 패배 같은 종말론적 행태를 알지 못한다. 띵에 쓰러진 자가 일어서려면 반드시 쓰러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야 하는 것처럼, 숲은 재난의 자리를 딛고 기어이 일어선다. 숲은 재난의 자리를 삶의 자리로 바꾸고, 오히려 재난 속에서 삶의 방편을 찾아낸다.

  숲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 따르면 산불이 쓸고 간 자리에는 큰 키 나무들(주로 소나무)이 다 죽기 때문에 햇빛이 땅바닥까지 잘 들어오고 식물의 밀도가 낮아져서 나무들끼리의 경쟁이 현저히 감소되며, 타고 남은 재가 거름이 되기 때문에 나무들이 다시 이 재난의 자리를 개척해 들어올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1996년에 불타버린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의 숲은 지난 4년 동안 그렇게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일구어냈다. 강원대학교 정연숙 교수(생명과학부)의 연구에 따르면 1996년 산불 때 나무는 죽었으나 땅은 죽지 않아서 활엽수의 타다 만 그루터기들은 움싹을 길러냈고, 풀들의 땅속 줄기를 다시 살려냈다. 불난 지 5개월 후에 싹들은 다시 솟아났다. 그리고 4년 후에는 불탄 나무들이 저절로 쓰러져 없어져갔고,숲은 작은 키 나무와 떨기나무로 층위를 이루고 있었다. 또 1986년에 불타버린 고성군 거진은 송강리의 숲은 지금 큰 키 나무와 작은 키 나무로 숲의 층위를 이루고 있다. 1978년에 불타버린 강원도 평창군 봉평리의 숲은 21년 후인 지금 큰 키 나무, 작은 키 나무, 떨기나무, 풀들로 건강하고도 완벽한 숲의 층위를 완성해냈다. 모두 다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저절로 된 일이다. 억지로 해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건국 이래' 때 차버린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의 숲은 지난 4년 동안 저절로 스스로를 키워왔고, 검고 붉은 산을 푸르게 바꾸어놓았다. 이 숲의 일부가 지난 4월의 '단군 이래' 때 또 불타버렸다. 인공조림 구역도 탔고, 자연복원 구역도 탔다. 영동의 숲은 타고 또 탔다. 인공조림한 숲은 나무의 대열이 줄을 맞추어 들어서게 되는데, 다 불타버린 숲은 시커면 그루터기들만 일렬종대로 남아 있었다.

  거듭 불타고 거듭 살아나는 이 숲이 '단군 이래'의 재난을 겪고 나서도 또 한번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은 어리석어 보인다. 숲은 사람의 바람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기어이 다시 살아난다.

  지난 4월에 불타버린 산은 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쓰러져 있고, 흙이 푸석푸석하게 들떠서 자전거로 들어갈 수가 없다. 산밑에 자전거를 대놓고 걸어서 올라왔다. 불탄 지 한 달 만에, 시키먼 그루터기 틈새에서 새빨간 움싹들이 맹렬한 기세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숲은 아주 죽지 않았다. 반쯤 타나 만 소나무들도 타지 않은 반쪽으로 새잎을 내밀고 있었고, 타다 만 풀뿌리에서도 싹들은 올라오고 있었다. 그레서 가까이 다가가 보면 시커먼 태백산맥은 햇빛이 비추는 능선을 따라가며 다시 눈물겨운 연두색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가물가물한 연두의 띠가 산멱의 능선을 따라서 저쪽 능선으로 넘어간다. 이 가엾은 연두가 이윽고 푸르고 넉넉한 숲을 이루어줄 것을 우리는 믿는다. 숲이여, 살아서 돌아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