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땅에 묻히는 일에 대하여 - 여수의 무덤들(1)

그림자세상 2010. 7. 23. 02:06

모든 무덤들은 강물이 흐르고 달이 뜨는 것처럼 편안하다.

 

 

봄볕이 내리쬐는 남도의 붉은 흑은 유혹적이다. 들어오라 한다. 부드럽게 부풀어오른 붉은 흙 속으로 들어가 누워서 백골을 가지런히 하고 쉬고 싶다.

 

가끔씩 죽는 꿈을 꾼다. 꿈에 내가 죽었다. 죽어서 병풍 뒤로 실려갔다. 병풍 뒤는 어두웠다. 칠성판 위에 누웠다. 병풍 너머에는 나를 문상 온 벗들이 모여서 소주를 마시며 떠들고 있다. 나는 죽은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살아서 떠드는 이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취한 벗들은 병풍 너머에서 마구 떠들었다. 내가 살았을 때 저지른 여러 악행이며, 주책이며, 치정을 그들은 아름답게 윤색해서 안주거리로 삼고 있었다. 취한 벗들은 정치며, 문학이며, 영화며, 물가를 이야기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세련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술집이며, 이발소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내 귀에는 취한 벗들의 떠드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아, 저 한심한 자식들. 아직도 살아서 저런 헛소리들을 나불거리고 있구나. 이 자식들아, 너희들하고 이제는 절교다. 절교인 것이다. 아, 다시는 저것들을 상종 안 해도 되는 이 자리의 적막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나는 그렇게 적막하게 갈란다. 병풍 뒤 칠성판 위에 누워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죽은 자의 위엄과 죽은 자의 우월감으로 처연했고 내 적막한 자리 위헤서 아늑했으며, 병풍 너머의 술판이 끼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누워 있었다. 그러니 그때 나는 덜 죽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나를 염하러 왔다. 나를 내다버리러 온 것이었다. 내 입을 벌리고 쌀을 퍼 넣었다. 나는 이승에서의 밥에 진저리가 났으므로 쌀을 뱉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잎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발가벗겨서 베옷을 입히고 꽃신을 신겼다. 그러더니 손발을 꽁꽁 묵었다. 나는 너무 아파서 살려달라고 울면서 빌었다. 저 캄캄한 흙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일을 생각하니, 발버둥이쳐졌다. 그러나 발버둥이는 쳐지지 않았다. 나는 발버둥이쳐지지 않는 발버둥이를 버둥거리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이 등판을 적셨고 아내는 돌아누워 잠들어 있었다. 마당에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개 짖는 소리에 매달려 다시 이승으로 돌아왔다. 써야 할 원고의 마감 시간이며, 글의 방향 같은 것들이 다시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어둠을 쳐다보면서 땀에 젖은 요 위에 누워 있었다. 나는 문상 왔던 병풍 너머의 벗들이 그리워서 어둠 속에서 울었다. 나는 죽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