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찻잔 속의 낙원 - 화개면 쌍계사(2)

그림자세상 2010. 4. 4. 02:32

  차에 관한 초의(1786~1866)의 글들은 낙원이 없는 세상 속에 낙원을 세우기 위한 타협처럼 읽힌다. 그의 타협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지만, 그 타협은 치밀하고도 부드러워서 인공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었고 삼엄한  논객이었지만, 그보다 앞서 그는 아무도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멋쟁이 승려였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색깔과 모양과 맛과 냄새의 아름다움을 색즉시공의 이름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한 모금의 차는 덧없는 세상의 일상성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깨달음이었으며, 삶과 선은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 모금의 차 속에 그 양쪽이 다 들어 있다.  

찻잎이나 찻잔, 물, 불, 장작, 숲, 화로, 탕기에 대한 그의 감식안은 때때로 범인이 이해하기에 지나치게 까다로워 보인다. 그의 까다로움은 자연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그것을 인간의 육신이 감지할 수 있는 국물로 정제해내기 위한 까다로움이다. 그리고 찻잔 속에서 그 까다로움은 소멸한다. 차에 관한 초의의 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그가 시간을 인간의 육신 쪽으로 끌어들이는 페이지들이다.

 

겨울에는 찻잎을 주전자 바닥에 먼저 넣고 끓는 물을 붓는다. 여름에는 끓는 물을 먼저 붓고 물위에 찻잎을 띄운다.

봄, 가을에는 끓는 물을 절반쯤 붓고 찻잎을 넣은 다음 그 위에 다시 물을 붓는다([다신전])

 

왜 그래야 하는지, 그렇게 해서 차 맛이 달라지는지를 물을 수는 없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 낙원은 일상 속에 있든지 아니면 없다. 청학동으로 가는 계곡에서 5월의 차나무 밑은 푸르다. 자전거는 청학동 어귀에서 방향을 돌려 화개 골짜기로 되돌아왔다.

 

  '덖음'은 차의 제 맛을 찾는 인공의 과정이다

 

  5월 초순에 화개 골짜기에서는 우전 차가 나온다. 우전은 곡우 닷새 전에 딴 햇차로, 무릇 차의 으뜸으로 여긴다. 이것은 중국 사람들의 입맛이다. 조선의 차는 입하에 가까워져야 온전해진다고 초의는 말했다.

  화개 골짜기에서는 올해의 햇차를 거두어들인 차밭 주인들이 저녁마다 이 집 저 집으로 마실을 다니며 차 맛을 다툰다. 이웃집 차를 마셔볼 뿐, 그 맛에 대해서는 내놓고 말하기를 조심스러워하는데, 내심으로 서로 두려워하고 있다.

  화개 골짜기의 차밭은 야생종 차밭이다. 고산지대에서 나는 차를 특히 귀하게 여겨 이것만을 찾는 승려들도 있다. 흐린 날에는 차를 따지 않고, 날이 저문 뒤에는 차를 따지 않는다.

  차를 따서 불에 말리는 과정이 '덖음'이다. 차 맛은 이 '덖음' 과정에서 크게 달라진다. 찻잎에는 독성이 있다. 그래서 차나무 밭에는 벌레가 없고, 놓아먹이는 염소들도 차나무 밭에는 얼씬거리지 않는다. 덖음은 차의 독성을 제거하고, 잎 속의 차 맛을 물에 용해될 수 있는 상태로 끌어내고, 차를 보관 가능하게 건조하는 과정이다. 그날 딴 차는 하루를 넘기면 안 되고, 그날 안으로 덖음질을 마쳐야 한다. 대체로 일고여덟 번 덖음질을 한다. 무쇠솥에 찻잎을 넣고 두 손으로 주물러가며 볶아낸다. 잠시도 손놀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덖음질을 오래 한 사람들은 열 때문에 손마디가 구부러져 있다.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의 손이 아니면 차가 익은 정도를 감지해낼 수 없다. 불은 흔들려서도 안 되고 연기가 나서도 안 된다. 차의 계율은 삼엄하고도 섬세하다. 그것은 자연의 본질을 추출해내기 위한 인공의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