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엄마 손을 잡고 40여 분 남짓한 그 통학길을 시작하던 며칠 동안 아이는 자신이 혼자 버스를 타고 가야할 걱정과 두려움 보다는 혼자 그 길을 가는 설레임과 뿌듯함으로 버스 안에서 몸을 뒤채게 하는 덜컹거림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야하는 일이 우선 성가신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그린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아이는 잠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자명종 시계 소리를 놓칠까 걱정은 되었다. 잠이 많았던 엄마가 가끔 자명종소리를 듣지 못하는 일이 있었던 터라 더욱 그랬다. 무엇보다 두려운 일은 입석고개를 넘는 일이었다. 두 번 정도 굽이 길을 틀어 넘어가는 입석고개는 아이가 보기에 위험한 길이었다. 마지막 굽이를 돌 때면 아래 시멘트 공장의 높다란 굴뚝이 까마득해 보일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그때 아이의 두려움이 빚어낸 과장된 그림이거나 아니면 아이 때 그러하듯 모든 것들이 더 크고 높게 보인 까닭이었을 것이다.
처음 그 고개를 혼자 넘던 아이는 고개 아래를 보지 않았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두려움은 더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아래 시멘트 공장의 굴뚝들을 똑바로 보게 될 수 있었을 때쯤 아이는 높은 곳에서 보는 광경이 그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던 것 같다. 시멘트 공장 굴뚝 아래 쌓인 돌가루들과 까만 코크스 더미,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컨테이너 벨트 위로 옮겨지는 포장된 시멘트 부대, 그 너머 드문드문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들과 나무들, 멀리 나지막하게 층을 이루며 이어진 산들과 산을 가로질러 뻗어있는 도로, 플라타너스 가로수들. 고개 위에서 보는 세상은 멀리 멀리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이는 그 먼 길이 얼마쯤 가야 홀로 가 있는 아버지가 계신 곳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오시지 않으면 그곳으로 갈 수나 있는 곳인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이름도 낯선 고개 너머 먼 세상들이 문득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어느 날, 고개를 오르던 버스가 멈춰 섰다. 창밖으로 바라본 고개 쪽 모습이 이상했다. 고개 위에서 부터 초입까지 차들이 길게 밀려있었고 사람들이 까맣게 고갯길 위에 서 있었다. 구급차의 싸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 것은 아이가 탄 차가 멈춰서고 조금 후의 일이었다. 아이는 상황이 짐작이 갔지만 고갯길 아래 굴러 기울이진 버스를 보고 나서는 더 이상 그곳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어붙은 고갯길을 오르던 버스가 제동 장치에 이상이 있었던 것인지 후진하면 굴렀던 모양이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들이 길 양 옆에 앉거나 서 있었고 뒤따르던 차에서 내린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거나 더러는 현장을 오가느라 분주했다. 앰뷸런스의 사이렌이 요란스럽게 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차들이 다시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아이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그 버스가 아이가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번호의 버스임을 보았다. 어쩌면 아이가 조금 일찍 나섰더라면 그 버스를 탔을 터였다. 그랬더라면 아이는 지금 다른 모습으로 그 고갯길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고갯길의 사고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비슷한 우연이 아이 곁을 몇 번이고 더 스쳐지나가게 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때 아이는 알 수 없었다. 차가 사고 지점을 지나 반대편 고갯길을 내려갈 때까지 아이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두려웠다. 차를 타고 그 고개를 넘어 다녀야만 하는 것이 처음으로 두려웠다. 그날 아이는 학교에서 종일 앉아 있었다. 수업이 끝나는 것이 싫었다. 다시 그 길을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아이는 그냥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어 버스정거장에 왔을 때 아이는 멈춰 선 버스를 몇 번이고 그냥 보냈다. 이윽고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게 되었을 때 아이는 그 고갯길을 지나지 않고 갈 수는 없는 것인지 운전기사에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고개에는 줄이 쳐져 있었고, 여전히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아침과는 달리 버스도 없었고, 사람들의 모습도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두려움이 조금은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고갯길을 돌아내려가는 내내 아이는 고갯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어쩌면 아이는 그날 처음으로 길 위의 삶에 서린 두려움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아이가 쉼 없이 걸어가야 할 그 길 위의 삶 말이다.
아침마다 집을 나서던 아이의 통학 길은 1학년을 다 마치고서야 끝이 났다. 집 근처 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 것이다. 아이의 아침 잠은 평온했고 걸어서 가는 학교는 멀지 않았다. 여름 장마철이나 한겨울이면 길은 여전히 비나 눈으로 질퍽거리면서 신이며 옷을 지저분하게 만들었지만 더 이상 아이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오가지 않아도 되었다. 겨울 아침의 차디찬 공기를 오래 쐬며 긴 골목길을 돌아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겨울 어느 아침 그 사고를 목격한 이후 버스를 탈 때면 이따금 문득문득 엄습하던 두려움도, 재를 넘을 때면 한 번씩 뒤를 돌아보기 힘들어져 괜스레 앞좌석의 손잡이를 꼭 움켜쥐던 손마디에 전해지던 뻐근함도 이제는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가 전학을 한 학교는 걸어서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는 새로 전학 간 그 학교에서 1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다시 먼 길을 떠나 옮겨가게 되겠지만 다시는 그때 그 통학 길 같은 먼 길을 걸어 학교를 다니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처럼 차가우면서도 기분 좋은 아침공기를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 새벽 아침 찬바람을 가르며 바다로 이어지는 강 위의 다리를 건널 때가 되기 전까지는. 그때 그 차가운 겨울 아침의 공기를 마시며 나서는 길 위의 시간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뒤에 말이다. 그동안 길 위에서의 아이의 시간은 잠시 유예되었지만 더 오래 멀리 갈 길은 아직 오지 않았다. [끝]
'Texts and Writings > My essay-to remember the pas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쌍용에 관한 몇가지 사소한 기억들(2) (0) | 2010.07.18 |
---|---|
쌍용에 관한 몇가지 사소한 기억들(1) (0) | 2010.07.18 |
길 위의 시간 (1) (0) | 2010.07.16 |
그라운드의 빛과 그림자 (5) (0) | 2010.07.13 |
그라운드의 빛과 그림자 (4) (0) | 2010.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