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My essay-to remember the past

길 위의 시간 (1)

그림자세상 2010. 7. 16. 21:11

  한 겨울 아침, 아이가 집을 나선다.

밤색 털이 달린 귀 가리개가 있는 짧은 창의 빨간 털모자에 폭 싸인 여덟 살짜리 아이의 얼굴은 겨울 차가운 아침 공기에 쨍하게 굳고 양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장갑을 끼지 않은 곱은 손을 번갈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하며 아이는 골목길을 돌아나간다.

  몇 권의 책, 연필과 공책이 든 만만찮은 무게의 허름한 책가방은 등 뒤에서 미처 쫓지 못한 졸음과 함께 아이를 자꾸 잡아당긴다. 골목길을 돌아 나가는 아이의 발밑에 얼었다 녹았다 하는 한겨울의 땅은 가뭄에 마른 논처럼 여기저기 쩍쩍 갈라져 있고 군데군데 물웅덩이 자리엔 얼었다 깨진 날카로운 얼음조각들이 삐죽 솟아 있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삐죽삐죽 솟은 얼음조각들과 집안에서 내다버린 아침 세숫물이 덜 얼어 질척거리는 곳을 피해 버스 정거장까지 걸음을 재촉한다.

  아침 7시 20분, 초등학교 1학년 등교시간으로는 이르다. 많이 이르다. 하지만 도(道)를 넘나들며 통학을 해야 하는 아이에게 이른 시간은 아니다.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40여분 가까이 가는 시간, 내려서 걷는 10여 분의 시간을 생각하면 그 시간에 나서도 여덟 시 40분까지 등교하기가 수월찮은 시간이다.

  아이는 싸늘한 겨울 아침 공기가 싫지 않다. 아침 일찍 서둘러 일어나는 일도 귀찮지 않다. 더러 덜 깬 잠 때문에 길에서 미끄러진 적도 있고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좌석 손잡이에 머리를 부딪쳐 눈에 눈물이 핑 돌 만큼 아파본 적도 여러 번이지만 아이는 얼굴을 얼릴 듯 살을 에는 차가운 겨울 아침 공기가 좋았다. 창이 짧은 귀를 덮은 빨간 털모자에 폭 싸인 머리의 따뜻한 느낌과 얼굴에 부딪쳐 오는 싸늘한 아침 공기의 느낌은 무언지 모를 신비한 두 세계가 아이의 몸 위에서 만나 누가 이기나 한바탕 힘자랑을 하는 것 같았다.

골목길을 지나 정류장 까지 걸어 갈 때면 아이는 차가운 공기와 살을 에는 듯한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따뜻한 털모자를 꾹 눌러 쓴다. 털모자를 쓴 머리는 따뜻하지만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은 시리고 엷은 운동화 밑바닥, 발은 아리다. 그래도 아이는 싸늘한 겨울 아침 공기가 좋았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아이는 가방을 이리저리 고쳐 메 보기도 하고 까치발을 한 채 버스가 오는 쪽으로 길게 목을 빼 보기도 한다. 이윽고 버스가 오고 아이는 쫓아 올라 뒷좌석으로 간다. 아이가 앉는 곳은 맨 뒷좌석이 아니라 뒷좌석과 뒷문 중간쯤의 창가 쪽이다. 갈 때는 왼쪽, 올 때는 오른쪽.

  버스 안에서 아이는 이따끔씩 졸기도 하고 사람들의 무표정한 옆모습을 흘낏흘낏 훔쳐보기도 하지만 대부분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에 눈과 마음을 뺏기고 있다. 매일 보는 나무고 길이지만 길을 나서는 아침이나 돌아오는 저녁마다 풍경들은 아이에게 매번 다른 느낌을 준다. 창밖을 통해 보이는 하늘에는 아이가 이해하지 못할 글자들과 아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장으로 흘러가는 구름들이 떠다녔다. 어떤 날 창밖의 그 모르는 글자들과 낯선 고장들이 문득 궁금해지기라도 하면, 아이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흔들리는 버스 안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바닷가 어느 해변으로도, 버스가 넘어가는 재보다 수 십 배나 더 높다란 산으로도 바뀌었다가 아직 아이의 눈에 한 번도 비친 적이 없는, 그러나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아이가 더러더러 만나게도 될 수많은 글들이 더러는 또렷하게 더러는 흐릿하게 흘러가는 책장으로도 변했다가 했다. 아이는 궁금했다. 버스가 넘어가는 재보다 수 십 배는 더 높은 산을 지나 보일 세상이, 가방에 들어 덜컹대는 교과서의 글자들이 뒤엉켜 아주 커다랗고 두꺼운 책이 되어, 천정 끝까지 쌓여있을 그 낯선 세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