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My essay-to remember the past

그라운드의 빛과 그림자 (2)

그림자세상 2010. 7. 12. 15:35

   내가 다니던 학교가 있던 군에서는 매년 군내 초등학교 대항 축구대회가 열렸다. 2~3일 동안 계속 치뤄지는 이 축구대회는 아이들뿐 아니라 근동 읍내의 어른들까지 관심을 보이고 참석하는 연례행사였다. 매년 장소를 바꿔 축구대회가 열리는 학교 운동장은 시골장터처럼 변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각자 모교를 응원하느라 신이 나기도 했지만 그와는 상관 없더라도 축구대회는 읍내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동네 잔치같은 역할을 했다.

  2~3일 동안 여러 학교들이 토너먼트를 치워 우승팀을 가리는 시합이다보니 경쟁도 치열했다. 학교에서는 경기의 우승이 학교의 위상을 높이는 문제로 인식하여 많은 관심을 쏟았고 마을의 어른들도 자신의 출신학교가 우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적잖은 관심을 보여 행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지고 경기는 치열해져 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운동경기가 그렇듯이 언제나 강팀은 있는 법이었다. 황성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와 월평군의 월평초등학교, 그리고 내가 다니던 중앙초등학교가 가장 강팀에 속해 있었다. 3학년 때 학교로 전학을 왔던 나는 4학년 때 축구부에 들었다. (하지만 이 축구부라는 것이 지금처럼 전문적으로 축구를 하겠다는 아이들이 가는 것이 아니었고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하던 것이었다. 우리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다른 특별활동과는 조금 다르게 하고싶다고 그냥 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기본적인 테스트도 받고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속독반과 축구, 두 개의 특별활동을 했다.) 

  처음 내가 축구부가 되었던 해 우리학교가 군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나는 후보였고 경기에는 거의 뛰지 못했다. 4학년이었으니 주전으로 뛰기는 애초부터 무리였다는 것을 나부터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기를 지켜보면서 한 게임 한 게임 이기고 마침내 우승을 할 때 느끼는 기쁨은 경기에 뛴 선수 못지 않았다. 내년에는 나도 형들처럼 경기에 참여해 뛸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희망에 우승을 한 기쁨을 더 크게 느꼈던 것 같다. 다음 해 5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학교는 또 우승을 했고 나는 후보로 몇 게임에 출전을 했다. 기쁨은 더 컸고 다음 해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다.

 

  군 대회에서 우승을 한 우승팀은 광주에서 열리는 도내 초등학교 축구대회에 출전을 했다. 도 대회는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녹색의 잔디가 깔린 공설운동장에서 뛸 수 있다는 기대감은 당시로서는 가장 큰 꿈이자 다른 어떤 것보다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었다. 5학년으로 참가해서 우승은 했지만 6학년 선배들이 있었던 터라 그 도대회에 나가지 못해도 6학년이 되는 다음 해에 우승하면 그때는 녹색 잔디가 멋지게 깔린 푹신푹신한(!) 공설운동장에서 뛸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은 점점 더 커져갔다. 두 번 연속 우승한 이후 학교에서도 3회 연속 우승을 위해 지원도 많이 하고 축구부원들의 연습 시간도 늘렸다. 사실 특별활동으로 하는 것이었으니 패스 연습과 슛팅 연습 외에도 달리기 등 평소에 하는 축구부 활동으로서의 운동은 늘 시간마다 했지만 조금씩 시간이 늘면서 속독부 활동 등 다른 특별활동에 참여하는 시간을 줄여서 축구연습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장선생님과 동문들이 3회 연속 우승에 신경을 쓰는 만큼 선생님--물론 운동을 하던 체육선생님이긴 했지만 전문적인 축구선수는 아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도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방과후에도 연습을 늘려서 할 정도로 연습 시간이 늘었다.

  우리에게 두 번 연속 결승에서 패한 학교는 이웃 월평읍의 월평초등학교였다. 우승 횟수는 우리가 더 많았지만 항상 힘들게 이기곤 하던 팀이었다. 월평초등학교는 결승에서 두 번이나 연속 우리에게 패한 이후 3회 연속 우승을 우리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월드컵의 줄 리메컵도 아니었는데 3회 연속 우승한 팀이 우승기를 영원히 보유하고 새로 우승기를 만드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월평으로서는 그런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유명한 축구선수 출신의 코치를 데려와 강훈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때 우리 학교를 상징하던 마스코트는 호랑이, 월평의 마스코트는 독수리였고, 우리는 빨간색, 월평은 푸른색 유니폼을 입었다. 읍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서울에서는 아주 멀리 떨어진 학교라 두 상징물을 사용하는 학교 출신의 선생님들이 많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우연히 한 학교의 선생님이 이 상징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자기 학교의 상징 마스코트와 색으로 사용하자고 제안을 했을 것이다. 상대방 학교에서는 그런 모습에 자극받아 또 다른 라이벌 상징과 색을 차용한 것이 아닌가, 나중에 이 두 상징물을 사용하는 대학교의 정기전을 본 이후 그때를 생각하며 그런 짐작만 했을 뿐 어떻게 이런 상징과 색을 사용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사실 그때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쨌건 당시 월평에 오신 선생님이 연세대학교 축구부 출신이라고 하더라, 작전을 잘 세우고, 훈련을 체계적으로 잘 하고 있다더라는 등의 소문이 시합을 앞두고 왁짜하게 퍼졌다. 우리도 질세라 연습을 많이 했지만 매년 열리는 대회를 앞두고 읍내 빵집에서 그 학교 축구부의 파란 유니폼을 갖춰입은 선수를 보았을 때 그 멋진 파란 색이 더 파랗고 멋지게 보여 은근히 부러운 마음도 든 적도 있었다. 

 

  대회는 시작되었고 읍내와 근동의 사람들은 다른 어떤 때보다도 경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주전으로 경기에 출전했고 우리는 한 두 경기 힘들게 치루기는 했지만 무난히 결승에 진출했다. 역시 상대는 월평이었다. 예선전부터 본 월평의 경기는 대단했다. 어린 우리가 보기에도 일사분란하게 작전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확연했고, 화이팅이 넘쳤으며, 경기 내내 큰 소리로 아이들을 격려하며 작전을 지시하는 말로만 들었던 서울 젊은 코치선생님은 멋져 보였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월평은 게임을 정말 잘했고 사람들은 월평이 우승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그들의 게임이 두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선수들의 체격이 우리들보다 좋았다. 어떤 아이는 머리통 하나는 커보일 정도였다. 반면, 우리팀은 센터포워드였던 학생회장 동민이와 라이트 윙이었던 '비호' 재호를 제외하면 다들 고만고만했다. 미드 필터를 맡고있던 나와 광수는 전체를 통틀어서도 제일 작은 축에 속했다.

  드디어 두 학교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결승전의 모습을 상세하게 중계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몇몇 단편적인 기억들이 있지만 그 이야기를 풀다 보면 시간의 켜에다 우리팀에 대한 나의 편애가 우리에게 유리한 한편의 드라마를 만들어낼 공산이 크니 그만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확실히 기억하는 한 가지는 우리가 고전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전까지는 볼 배급을 맡아 역할을 잘 해내면서 게임을 이끌어왔던 내가 많이 부진했다. 월평 선수들의 덩치에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밀려 넘어지고 걸려 넘어지고 내내 고전했다. 중앙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시도한 그들이 작전에서 성공한 것 같았다. 중원에서 시작된 고전은 전체 게임에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시합 내내 밀리다가 간간히 역습을 하는 공방전으로 맞섰다. 밀리는 가운데서 골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 우리에게 행운이 따르는 전조였을 것이다. 결국 해결사는 '비호' 재호와 아이들의 우상, 학생회장이자 전교 1등 동민이었다. (왜 그때는 한 아이가 이 모든 것을 다 잘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그때 우리의 나이도 시절도. 둘도 없는 친구였던 동민이는 나중에 중학교를 함께 다니가 광주의 고등학교로 진학을 한 뒤 내가 포항으로 이사오는 바람에 한 두번의 편지 끝에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아주 한참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전대협 대변인의 모습으로 인터뷰를 하는 동민이를 텔레비젼 화면에서 보게 될 때까지 만나지 못한다. 꼭 만나야 할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 친구, 동민이다.) 다시, 축구 이야기로 돌아가서, 라이트 윙이었던 재호의 빠른 달리기는 놀라웠다. 공을 다루는 실력은 좀 부족했지만 공을 쳐 놓고 뛰어가면 재호를 따를 친구가 없었다. '비호' 딱 그 별명에 어울리는 친구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비호' 재호가 공을 쳐놓고 쏜살같이 달려가 띄워 주고 동민이가 헤딩으로 결승골을 넣었다. 전반적인 경기 운영에는 내내 밀렸지만 결국 승부는 우리가 이겼다. 3회 연속 우승도 기뻤지만 내가 기뻤던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드디어 녹색의 잔디가 출렁이는 공설운동장에서 뛸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른 먼지 풀풀나고 조금만 넘어져도 온몸이 까지고 상처투성이가 되는 돌투성이 맨땅 학교 운동장이 아니라 점프를 했다 곤두박질쳐도 푹신하게 안아주는 것 같고 슬라이딩을 하면 십 미터는 미끄러져 간다는, 녹색 잔디 하늘거리는 공설운동장의 잔디구장에서 축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그 기분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짜릿할 정도이다. 마침내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Dreams came 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