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에 내리는 어둠은 갑작스럽다. 해가 지는 서녘에서 동쪽을 바라볼 때 산은 환하다. 이우는 저녁 해의 빛을 받은 산은 아직 환한 낮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산 능선을 넘어서자 마자 밝은 빛은 사라지고 어둠이 산 뒷편을 온통 감싸안는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서녘으로 지는 해를 받은 산 능선이 마지막 햇살의 강렬함으로 환하면 환할수록 그 뒷면 어둠은 짙다. 하여 오를 때는 환한 밝음을 받으며 오르지만 능선이나 고개를 넘어서자 마자 깎아지른 절벽처럼 불현듯 다가서는 어둠에 숨이 턱 막히는 경험을 몇번 느즈막히 산을 오르다 한 적이 있다.
그날도 그랬다. 서쪽으로 지는 해를 등지고 능선을 보면서 오를 때는 환한 대낮이었다. 숲속을 홀로가는 걸음이 가벼울 리 없지만 지은 죄가 있는지라 어쨌건 집에 가야한다는 절박함이 다른 한 두려움을 앞서고 있어서 환한 산길을 걷는 것이 두려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유예되었던 두려움과 놀라움은 능선을 넘어서자 한꺼번에 쏟아지는 어둠과 함께 해일처럼 다가왔다. 조금 어둑한가 싶더니 갑자기 눈이 먼 것처럼 캄캄해지는 앞 숲길의 적막함 속에 바람에 스치는 풀과 나뭇가지 소리는 목덜미를 잡아채고 발걸음을 묶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기가 두려웠고, 앞길은 캄캄했다. 마음속에 생기는 두려움이 내 죄책감을 앞서기 시작했다.
환한 대낮에 아이들과 산에 올라 놀 때면 우리들 소란스런 소리에 꽁무니쳤을 이름도 모를 산새들과 풀벌레들의 지저귐과 울음소리는 하나하나 뽀족한 가시바늘처럼 귀에 마음에 섬찟한 상흔과 온 몸에 찌릿한 전율을 남기며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바람소리는 저승에서 들려오는 호명소리 같았고 발목을 잡아채며 옷을 잡아끄는 풀들은 갈고리 달린 땅 속 존재들의 손아귀 같았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마음은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지듯 요동치고 자꾸 뒤에서는 무언가가 옷을 잡아 끌며 보채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 앞을 보고 산길을 계속 걷는 것도 두려웠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더욱 두려웠다. 마음으로는 수십 번도 넘게 소리치고 울음이 볻받쳐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내어 두렵다 말하면, 소리내어 울음 터트리면 다시는 걷지 못할 것 같았다. 이따끔 눈도 감고, 아무 의미도 없는 혼잣말을 하면서 내 발걸음에 몸과 마음을 다 맡기고 그저 걸었다. 한번 내린 어둠은 점점 더 칠흙처럼 깜깜해지기 시작했고 산속길을 홀로 걷는 내 두려움은 더 깊어졌다. 그리고 길을 잃었다. 그리 또렷하게 난 길도 아니었지만 그나마 사람 걸음의 흔적을 담고 있던 길마저 어둠속에 사라져버렸다. 나는 꼼짝도 못한 채 산속 숲길 속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어느덧 하늘에는 저녁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여느 평범한 때 같았으면 집앞 마당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아이들과 소란스런 저녁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생각하니 그때의 내 상황이 더욱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한 채 두려움과 추위에 떨며 서있던 그때 내게 들려온 것이 할머니 목소리였다.
"산 속에서 길을 잃으면 묏등에 가거라. 묏등 주인이 지켜줄게다."
대낮에 산에 오르면 지천에 보이는 것이 묏등이었지만 어둠 속에서는 그 묏등마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얼마간의 시간 동안 아마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 있었던 것 같다. 머릿속에는 온통 할머니의 그 말뿐이었다. 두려움은 이제 묏등을 찾아야한다는 마음에 자리를 양보했다. 조금전까지만해도 모든 두려움이 산속에서 다시는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단 하나의 두려움에 자리를 양보했는데, 이제는 그 두려움마저 묏등을 찾는 절박함에 밀려난 것 같았다. 한 가지 절실함은 그보다 덜한 다른 모든 절실함을 잠시 잊게 만드는 것을 그때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얼마나 헤맸을까. 어둠속에 묏등을 발견했다. 산속에서 무덤을 보고 그렇게 기뻐한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두려움 속에서도 그 순간은 잠시 깜깜한 마음에 별빛 한조각이 들어온 것 같았다.
숲속의 무덤. 그것도 어둠 까만 숲속의 무덤은 괴기영화나 공포영화에 어울리는 장치이지 산 속에서 길 잃은 어린아이가 보고 기뻐할 세팅은 전혀 아니질 않은가. 하지만 그때 나는 분명 안도감을 느꼈다. 길을 잃었다는 공포, 다시는 집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 순간은 잠시 사라졌다. 묏등 옆에 가방을 놓고 쪼그려 앉았다.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아마 한참 전부터 무지하게 고팠을 배였지만 배고픔에 몸이 반응하기에는 너무 많은 감각과 감정들이 내 몸에서 서로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제 그 모든 것들이 잠시 멈추자 뱃속이 허전함으로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쪼그리고 앉았던 몸을 묏등에 기댔다. 따뜻했다! 정말 따뜻했다. 무덤의 뗏장과 풀들이 꺼끌거리면서도 따뜻했다. 몸과 마음의 경직이 한순간 스르르 녹아내렸다.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도, 집에 돌아가야한다는 사실도, 돌아가더라도 그 뒤에 닥칠 온갖 일들에 대한 모든 생각도 그 순간은 사라졌다. 묏등에 기댄 채 나는 그렇게 스르르 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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