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내가 여섯 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할머니에 대한 많은 기억과 추억을 간직하기에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은 짧았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내 기억 속에 가장 먼저 또렷하게 떠오르는 광경은 할머니의 장례식날이다. 철 모르던 나는 갑자기 몰려든 낯선 사람들과 오랜만에 찾아온 친척들로 붐비던 사택앞 마당에 쳐진 천막 아래서 오촌 아제와 동전 던지기, 딱지치기를 하며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집 안에는 운명한 할머니가 모셔져 있었지만 어린 나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분주하게 음식을 하고 이리저리 나르느라 바쁜 엄마와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임종하실 때 할머니 연세 일흔 다섯. 당시로서는 이른 나이라 할 수 없었지만 병을 앓다 돌아가셨으니 호상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아주 침울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장례에 참석하신 친척어른들과 이웃들은 차양 아래 술자리에서 더러 고함도 치시고 다투기도 하는 모습이 없지 않았으나 어린 내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 크게 저어되지 않을 분위기였다. 장례식 내내 나는 가장 가까왔던 오촌 아제와 함께 마당에 쳐진 차양 아래서 동전과 구슬을 가지고 놀았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또 하나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할머니가 해주신 말씀이었다. 언제 어떻게 또 왜 그 말씀을 해주신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할머니가 해주셨다는 것만은 또렷하다.
"용아, 산 속에서 길을 잃거든 묏등에 가거라. 묏등 주인이 지켜줄게다."
잠깐 샛길을 다녀오자. 어릴 적 내 아명은 용이었다. 용용자, 용(龍)이었다. 할머니가 꾸신 태몽을 따라 그리 불렀다 한다. 할머니가 꾼 내 태몽은 큰 용이 한마리 승천하는 것이었다하니 꿈은 좋으셨나보다. 그러나 그 동네에서 태어난 사내아이치고 할머니나 외할머니가 용꿈 꾸지 않고 낳은 아이 몇이나 되었을까. 아예 동네 이름이 쌍용(雙龍)이었다. 동네 뒷산에 조그만 동굴이 있는데, 옛날에 거기서 이무기 두 마리가 살다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을 담은 이름이었다. 하여간 그리하여 어릴적 내 이름은 용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이름이 재미있다. 여 용! "음, 자네 이름이 뭔가?" "용입니다. 여용." 혹여 이렇게라도 대답할라치면 코미디의 한 코너가 떠오른다. "여용이여용!" 할머니의 꿈처럼 내가 용이 못 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아명이 호적 이름이 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하여간 할머니의 그 말씀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왜 하셨는지는 정말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사면이 다 산이었던 강원도인데다 고사리며 나물을 따러 산에자주 가기도 하고 또 아예 아이들이 산에 올라 노는 일이 태반이기도 했으니 조심하라는 할머니의 마음이 그리 전해졌나보다. 그러나 어디 산에서 길 잃을 일이 있을 것이며, 그렇다고 어린아이가 귀신이 나올지도 모르는 묏등에 가겠는가.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할머니의 그 말씀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이렇게 덧붙이셨다.
"묏등 주인은 제 집에 찾아오는 사람을 해코지 하지 않는 법이다. 산 사람은 마음을 몰라도 죽은 혼령은 사람 마음을 아는 법. 그러니 묏등 주인이 내가 기대고 찾아가는 마음을 알아줄게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 나이 여섯. 그러니 그 말씀을 들었던 것은 더 어린 나이였을텐데 어린 나이의 내게 그 말이 그렇게 또렷하게 들어와 앉은 이유는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까지도 할머니의 그 말씀은 너무도 또렷하게 내게 남아있다. 그렇긴 하나 당시 어린 내 마음에 아마 그런 생각은 분명했을 것이다. 산속에서 길을 잃을 이유가 어디 있으며, 또 그렇다고 무서운 묏등에 갈 수나 있을까. 그런데 그런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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