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dailylife

작고 꾸준한 보폭으로 오래 멀리 걷기에 대하여(1)

그림자세상 2010. 6. 21. 12:30

오늘은 그동안 언젠가 한번 이야기 하고 싶었던

한 어르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고나니 무슨 대단한 이야기 같지만 아니다.

기실 할 이야기가 있기나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언젠가 그분에 관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을 뵌 그 시간에 관해 무슨 말이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다가 말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아무말을 못할 수도 있는 이야기.

그분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누구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어쩌면 모두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이야기.

딱히 누구에게가 아니라 그저 혼잣말 처럼 나에게 하는 이야기. 

............

 

나는 그분을 모른다.

그저 아침에 조금 일찍 집에서 나올 때 뵙고 지나칠 뿐이다.

아침이면 아파트 입구의 정원을 가로질러 지팡이에 의지한 채, 혹은 할머니의 부축을 간간히 받은 채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그분의 한결같은 집중을 알 뿐이다.  

 

한 3년은 분명 넘었을 것이다.

처음 그분을 보았을 때, 아마 비오는 늦가을 아침이었을 것이다.

비내리는 이른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은 차가운 아침의 빗물에 마음을 적시며

모두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산 속에 자신을 감추듯 묻고 어깨를 숙인 채 빗물이 고여 튕기는 바닥을 바라보며

제각기 길을 재촉하는 사람들 틈에서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가던 내 눈에

옆 정원으로 난 맞은 편 길 위를 우비를 입은 채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옮기는 그 어르신이 들어왔다.

우비가 헐렁해 보이는 자그마하고 마른 체구,

활모양 조금 굽은 어깨,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말려올라간 채 펴지지 않는 오른 손,

왼손에 부여잡은 지팡이.

그 지팡이에 의지한 채 한걸음 한걸음 빗속에서 발을 옮기는 그 분은 힘겨워보였다.

그분의 한 걸음은 아이들의 한걸음 보다 작고 폭은 좁았으며,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온몸이 그 걸음을 다 지탱하고 밀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힘겨워보였다. 

모퉁이를 돌아나가는 입구를 빠져나가면서 돌아보았을 때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주춤주춤 걸음을 옮기는 시늉만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찌보면 아주 생소한 모습은 아니었다.  

중풍이나 뇌졸증 같은 병명이 언뜻 연상되고 아마 그 발병 이후

재활을 하시는 중이리라는 것은 누가 봐도 충분히 짐작가능한 모습이었을테니.

나에게도 그랬다.

다만 주춤주춤 걷는 듯 걷는 듯 하면서도 제자리 걸음 같은 그 걸음과

온통 한걸음 옮기는 데 집중하는 그분의 모습이 아마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가는 내내 지하철 안에서도 잠깐씩 쉬는 시간에도

그날 처음 뵌 그분의 주춤주춤하는 걸음걸이가 머리속에 자주 보였다.

 

그렇게 처음 그 모습을 뵌 이후 자주 그 어르신의 주춤거리를 걸음걸이와 만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은 매일 그 시간이면 그곳에서 걷고 계셨을 것이고,

나는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날 때만 그분을 뵈었을 것이다.

어느날은 조금 앞선 곳에서

어느날은 조금 뒤쪽에서

어느날은 혼자서

어느날은 할머니가 옆에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그분은 걷고 또 걷고 계셨다.

어떤 날은 모퉁이진 입구를 지났다가 다시 돌아와 아파트 벽 사이로

그분의 주춤거리는 걸음과

온 신경을 집중하여 걷는 데 몰입하고 계신 그분의 자그마한 체구와 

처진 어깨와 말려올라간 손과 쓰고 계신 모자를 늦지 않을만큼 보다가 가기도 했다.

 

매일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날 때 그분을 뵙지 못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아

어르신은 언제나 그 시간에 그렇게 그곳에서 걸음 걷는 연습을 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눈이 아주 많이 내려 몇십년만의 폭설이라고 했던 그 언저리의 어느날에도,

비가 내리던 여름 아침에도, 바람 차던 가을에도,

목련과 개나리, 진달래가 화사하게 피어오르는 봄날 아침에도

아마 어르신의 그 작고 끝없을 것 같은 걸음은 계속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그분을 뵌 지 3년 가까운 시간,

단 한 순간도 나는 그분이 앉아서 쉬는 모습을 뵌 적이 없다.

이따끔씩 그 자리에 멈춰서 가쁜숨을 몰아쉬며 숨을 고르며 쉴 뿐이었다.

그리곤 이내 다시 작은 걸음을 주춤주춤 온 신경을 집중하며 옮겨갔다.

그 걸음을 다시 걷지 않으면 금방 쓰러지기라고 할 것처럼.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분의 온 몸은 그 작은 걸음에 따라 흔들렸고 머리도 함께 진동했다.

그분의 한걸음 한걸음은 그저 발로 가는 걸음이 아니라

온몸으로 흘러가는 작고 굽이진 도랑의 끊길듯 말듯한 물길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