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다시 숲에 대하여(2)

그림자세상 2010. 2. 27. 13:53

  은사시나무숲의 신록은 수줍고 또 더디다. 다른 모든 숲들이 연두에서 초록으로 두터워져갈 때, 은사시나무숲은 겨우 깨어난다. 갓 깨어난 은사시나무숲은 희뿌연 연두의 그림자와 같다. 멀리서 보면, 은사시나무숲의 신록은 봄의 산야에 낀 안개처럼 보인다. 이 숲에서는 젖을 토하는 어린 아기의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나무가 싹을 내밀기 전에, 나무의 안쪽에 감추어져 있던 생명의 비밀을 생각하게 하는데, 그 비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은사시나무는 높고 밑둥은 굵지 않아서 은사시나무숲은 전체가 바람에 포개지면서 흔들린다. 은사시나무숲의 이파리들은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일제히 뒤집히면서 나부껴서, 은사시나무숲은 풍향에 따라서 색이 바뀐다.

  오리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숲 들의 신록은 거칠게 싱싱하다. 그 숲의 이파리들은 아름다움의 정교한 치장으로 세월을 보내기 않고, 여름의 검푸른 초록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이 숲의 이파리들은 억센 사내들의 힘줄 같은 잎맥을 가졌다. 이 숲은 봄의 현란함이 아니라 여름의 무성함 속에서 완성되는, 넓고 힘센 활엽수들의 숲이다. 이 숲에서는 짙은 비린내가 나고 바람이 불 때 마다 폭포 소리가 난다.

  섬진강을 따라서 남쪽으로 자전거를 달릴 때, 신록의 산들과 여러 빛깔의 숲들이 강물 위에 거꾸로 비쳤다. 성불하지 못한 산속의 젊은 승려는 결국 갈 수 없는 숲을 쳐다보고만 있을 것이었다. 숲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너무 멀다. 모래톱 물가에서 혼자 사는 왜가리 한 마리가 물음표 모양으로 서서 물에 비친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톱 크기 조개에서 우러난 맨 밑바닥 기초의 맛

 

  재첩국은 하동포구를 대표하는 국물이다. 비싸지 않고 요란하지도 않은 음식이 한 지방을 대표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하동의 재첩국, 안동의 간고등어, 충무의 김밥, 의정부의 부대찌개, 나주의 곰탕 등이다.

  하동 재첩국은 순결한 원형의 국물이다. 여기에는 잡것이 전혀 섞여있지 않다. 이 국물이 갖는 위안의 기능은 봄의 쑥국과 거의 맞먹는다. 이것은 하나의 완연한 세계를 갖는 국물이다. 이런 국물은 흔치 않다. 재첩은 손톱 크기만한 민물 조개다. 재첩국은 이 조개에 소금만 넣고 끓인 국물이다. 다 끓었을 때 부추를 잘게 썰어넣으면 끝이다.

  그 맛은 무릇 모든 맛의 맨 밑바닥 기초의 맛이다. 맫히고 끊기는 데가 전혀 없이 풀어진 맛이다. 부추가 그 풀어진 맛에 긴장을 준다. 오장을 부드럽게 하고 기갈을 달래준다. 옛 의학서에서는 재첩이 삶에 기진맥진한 사람들의 식은땀을 멈추게 해준다고 적혀 있다. 푸른 부추가 뽀얀 국물에 우러나서 그 국물의 빛깔은 새벽의 푸른 안개와도 같다.

  채접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강 하구 모래 속에서 산다. 재첩은 가장 작은 조개다. 강바닥을 깊이 긁어야 잡을 수 있다. 제첩은 봄부터 잡기 시작한다. 하동포구 주민들은 4월 하순부터 재첩을 잡기 시작한다. 함지박을 밀고 강 속으로 들어가서 바닥을 긁는다. 가장 낮은 곳에 사는 가장 작은 조개 속에 가장 깊은 맛이 들어 있다. 조개 몇 마리와 물과 소금이 그 국물의 형식의 전부다. 재첩 국물은 삭신의 구석구석으로 스며 들뜬 것들을 가라 앉힌다. 재첩 국물 속에도 작은 숲이 들어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