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다시 숲에 대하여

그림자세상 2010. 2. 18. 23:53

  다시 숲에 대하여

     -전라남도 구례

 

 잎들은 태어나서 땅에 떨어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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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번 국도는 전남 구례에서 경남 하동포구까지 섬진강을 동쪽으로 따라 내려간다. 강 건너편에서 강을 따라 쫓아오는 길이 861번 지방도로다. 강을 따라 출렁거리며 바다 쪽으로 흘러 내려오는 지리산의 연봉들은 점점 더 넓게 품을 벌려서 화개나루를 지나면 강의 굽이침은 아득히 커지고, 굽이침의 안쪽으로 넓고 흰 모래톱이 드러난다. 산이 새잎으로 피어나고 강물이 빛나서, 이쪽 길로 가려면 강 건너편 저쪽 길이 가깝다. 이럴 때는 이쪽 길로 강을 따라 내려갔다가 저쪽 길로 강을 거슬러 올라오면 된다.

  구례에서 출발하는 자전거는 861번 지방도로로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화개나루에서 나룻배로 강을 건너서 화개동 골짜기와 악양 골짜기로 들어갈 작정이다. 5월의 지리산 언저리와 섬진강가를 자전거로 달릴 때, 억눌림 없는 몸의 기쁨은 너무 심한 것 같기도 하고 살아 있는 몸이란 본래 이래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는 강가에서는 마구 페달을 밟으려는 허벅지의 충동을 다스려가면서 천천히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다시 숲에 대하여 쓴다. 피아골 계곡의 암자에서 차 한잔 나누어 마신 한 승려는 "온 산에 새잎 돋는 사태 속에 깨달음이 있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것을 알지만 거기에 가까이 갈 수는 없다. 이것도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법명을 묻자 그는, 그런 걸 묻지 말고 새잎 돋는 산이나 쳐다보고 가라고 한다. 다른 승려에게 물어보니 그의 법명은 법경이었다. 법경은 많은 책을 쌓아놓고 있는 젊은 승려였다. 그의 서가애눈 [유물론]도 보였다. 찻잎을 너무 아껴서, 그가 준 차 맛은 차의 먼 흔적처럼 어렴풓이 비렸다. 법경의 성불은 아득해 보였으나, 그가 부처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 새잎 돋는 산이나 쳐다보고 앉아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5월의 지리산 숲은 온 천지의 엽록소들이 일제히 기쁨의 함성을 지르듯이 피어난다. 나무들은 제 본래의 색으로 피어나 숲을 이루고 숲들은 제 본래의 색으로 산을 이루어, 수많은 수종의 숲들이 들어찬 지리산은 초록의 모든 종족들은 다 끌어안고서 구름처럼 부풀어 있다.

  5월의 지리산 숲은 소나무, 차나무, 편백 같은 상록수의 숲과 새잎이 돋아난 활엽수의 숲으로 대별된다. 상록수숲은 수종에 따른 색의 차이를 감지하기 어렵다. 소나무도 새 솔잎이 돋아나지만, 소나무의 새잎은 날 때부터 이미 강건한 초록색이어서, 소나무숲은 봄에도 연두의 애잔함이 없다. 전나무의 새잎은 연녹색이지만, 그 기간은 잠깐이고 전나무는 검푸른 녹색으로 봄을 맞는다. 화개 골짜기의 차나무숲이나 선운사 뒷산의 동백나무숲이나 화순군 동백면의 편백나무숲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상록수의 숲은 짙고 깊게 푸르러서, 그 푸르름은 봄빛에 들뜨지 않는다. 상록수숲의 푸르름은 겨울을 어려워하지 않는 엄정함으로 봄빛에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흰 눈에 덮인 겨울 산에서 상록수 숲의 푸르름은 우뚝하지만, 온 산이 화사한 활엽수들의 신록으로 피어날 때, 연두의 바닷속에 섬처럼 들어앉은 상록수의 숲은 더욱 우뚝하다.

  5월의 산에서 가장 자지러지게 기뻐하는 숲은 자작나무숲이다. 하얀 나무가지에서 파스텔톤의 연두색 새잎들이 돋아날 때 온 산에 푸른 축복이 넘친다. 자작나무숲은 생명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작은 바람에도 늘 흔들린다. 자작나무숲이 흐들리는 모습은 잘 웃는 젊은 여자와도 같다. 자작나무 잎들은 겨울이 거의 다 가까이 왔을 때 땅에 떨어지는데, 그 잎들은 태어나서 땅에 떨어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반짝인다. 그 이파리들은 사람이 느끼는 바람의 방향과는 무관하게 저마다 개별적으로 흔들리는 것이어서, 숲의 빛은 바다의 물비늘처럼 명멸한다. 사람이 바람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때도 그 잎들은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그래서 자작나무숲은 멀리서 보면 빛들이 모여사는 숲처럼 보인다. 잎을 다 떨군 겨울에 자작나무숲은 흰 기둥으로만 빛난다. 그래서 자작나무숲의 기쁨과 평화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들일 만하다. 실제로 북방 민족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자작나무숲에 깃들이는 것으로 믿고 있다. 자작나무숲으로 간 혼백들은 복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