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도요새에 바친다(1)

그림자세상 2010. 1. 2. 23:44

저무는 만경강 하구 갯벌 위로, 새들은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새들은 살아서 돌아온다.

 

  에베레스트나 낭가 파르바트를 오르는 등반가들은 8,000미터의 눈 덮힌 산정에서 얼어붙은 철새들의 시체를 발견하는 수가 있다. 캐나다 툰드리 숲에서 발진하는 철새들의 대륙횡단 비행 편대는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관통한다. 새들은 히말라야를 넘어서 인도의 남쪽 아드리아 바다로 이동하는데, 히말라야 상공의 돌개바람 속에서 기력이 쇠진한 새들은 눈덮힌 산꼭대기에 떨어져 죽고, 발붙일 곳 없는 산맥의 상공을 통과하는 바쁜 새들의 무리는 추락하는 자들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

 

  낭가 파르바트 봉우리가 눈보라에 휩싸이는 밤에, 비행 진로를 상실한 새들은 화살이 박히듯이 만년설 속으로 박혀서 죽는다. 눈먼 화살이 되어 눈 속에 꽂혀서 죽은 새들의 시체는 맹렬한 비행의 몸짓으로 얼어붙어 있다. 죽은 새들은 목을 길게 앞으로 빼고, 두 다리를 뒤쪽으로 접고 있다. 눈 속으로 날아가 박힌 새들은 비행하던 포즈대로 죽는다. 낭가 파르바트 북벽에 부딪히는 새들은 화살처럼, 총알처럼, 바람처럼 죽는다. 새들은 고속 돌진의 자세로 죽는다. 그것들의 시체 위에서 날개 달린 몸으로 태어난 그것들의 꿈은 유선형으로 얼어붙어 있고, 그 유선형의 주검은 죽어서도 기어코 날아가려는 목숨의 꿈을 단념하지 않은 채, 더 날 수 없는 날개를 흰 눈에 묻는다.

 

  낭가 파르바트를 동행 없이 혼자서 오르는 과묵한 등반가들이 눈 속에 박힌 새의 시체를 눈물겨워하는 것은 그 유선형의 주검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되 만년설에 묻힌 날개의 꿈은 그 떠도는 종족의 운명 속에서 부활하는 것이어서 모든 새들은 마침내 살아서 돌아온다.

 

  뉴질랜드 북쪽 해안에서 발진하는 도요새 무리들은 남태평양 중앙 회랑을 따라 연안에서 연안으로 이동하면서 알래스카로 간다. 낯선 대륙의 연안들을 징검다리처럼 건너온 도요새 무리들은 지난 4월 첫째 주에 한반도의 서쪽 연안, 만경강 하구의 갯벌에 당도하였다. 새들의 무리 중에서도 친애하는 종자들이 따로 있는 것인지, 새들은 수십대의 비행 편대로 나뉘어 저녁 하늘을 연기처럼 흘러서 갯벌 위에 내려앉았다. 먼바다에서부터 날개 각을 낮게 숙여 바람에 몸을 맞춘 새들은 날갯짓 한번 퍼덕거리지 않고 고요히 강 하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죽지 밑에서부터 날개 끝에 이르는 비행 근육을 작동시키는 새들의 앞가슴 용골돌기는 완강하고도 기름졌다.

 

  새떼들 돌아오는 저녁 하늘에서, 이미 며칠 전에 이 갯벌에 당도했던 도요새의 종족들은 다급한 목소리로 울면서 패거리들을 불러모아 또다시 북행하는 발진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고향이 없으므로 타향이 없다. 그것들은 여러 대륙과 반도와 섬의 연안에서 머무르고 떠난다. 알에서 태어나 바람 속을 떠도는 그것들의 고난은 포유류에서 태어나 정주하는 땅에 결박되는 자들의 고난을 동료 중생의 이름으로 위로할 만하다.

 

  새들은 다만 먹기 위하여 이 갯벌로 날아오는 것처럼 보인다. 썰물을 따라서 갯벌의 맨 가장자리로 나갔던 새들은 밀물에밀리면서 사람의 마을 쪽을 가까이 온다. 썰물과 밀물 사이의 넓은 갯벌에서 새들은 쉴 새 없이 부리고 갯벌을 쑤시며 먹이를 찾는다. 먹어두어야만 또 날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새들은 제 몸을 태워서 날아갈 수밖에 없다. 도요새는 부리를 뻘 속에 끌면서 밀물에 밀린다. 물떼새는 뻘 위로 올라온 먹이를 육안으로 감지하고 부리고 쪼지만, 도요새는 먹이를 조준하지 못한다. 도요새는 뻘 속에 파묻힌, 보이지 않는 먹이를 덮어놓고 쪼아댄다. 어쩌다가 걸려드는 것이다. 그러니 죽지 않으려면, 보이지 않는 먹이를 향해 쉴새없이 부리를 내리꽂아야 한다. 그래서 그것들의 부리는 딱딱하기보다는 부드럽고 민감하다. 부리를 무작위로 선택한 뻘흙 속에 찔러넣고 그 안에 넘길 만한 것이 들어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넘어가는 것보다 뱉어내야 할 것이 언제나 훨씬 더 많다.

 

  밥 먹기의 어려움은 도요새나 저어새나 대동소이하다. 저어새의 부리는 넓적하다. 밥주걱처럼 생겼다. 저어새는 이 넓적한 부리로 하루종일 뻘밭을 훓는다. 들짐승이 밥을 먹는 모습과 같다. 부리 안에 물린 흙 속에서 넘길 것은 넘기고 나머지는 뱉는다. 먹이를 넘길 때마다 길고 가는 목줄기가 껄떡거린다. 저어새는 위태로운 멸종 위기의 새다.

 

  4월 8일 오후 4시께 옥구 염전 앞 만경강 하구에는 밀물에 밀리는 저어세 열세 마리가 가까운 갯벌과 갯고랑에 입질을 하고 있었고, 사리만조가 갯벌을 다 뒤덮자 발붙일 곳 없고 먹을 것 없는 도요새들은 갈대숲으로 날아들었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다.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쌓아두지도 않거늘,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서 먹이시니라"라는 마태복음의 축복은 아마도 저 배고픈 새떼들의 고낭에 바쳐진 것이리라. 그 새떼들은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날 때 함께 이 세상으로 쫓겨난 실낙원의 새떼들처럼 보였다.

 

  진화가 생명의 운명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도요새가 중생대 백악기의 어느 갯가에서 그 종족의 독자성을 완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수억 만 년의 시공을 그것들은 해독되지 않는 높은 옥타브로 울면서 연안에서 연안으로 퍼덕거린다. 수억만 년 전에 이미 멸절된 종족의 직계 후손으로 이 연안에 내려온 새들은 또다시 수억만 년 후의 멸절을 행하여 필사적으로 날아간다. 지나간 멸절과 닥쳐올 멸절만이 그것들의 고향이고, 그것들은 이 세상의 모든 연안을 나그네로 떠돌며 고향으로 가고 있다. 그러므로 [종의 기원] 속의 새들은 창조주께서 보시기에 좋앗던 낙원의 새들보다 덜 아름답지 않다. 다만 불우하다. 이승의 연안에 내리는 다윈의 배고픈 새들은 멸절과 멸절 사이의 시공을 울면서 통과하는 필멸의 존재로서 장엄하다. 저무는 만경강 하구 갯벌 위로, 새들은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새들은 살아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