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망월동의 봄

그림자세상 2009. 12. 12. 23:09

    삶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

 

 

  망월동 5·18 묘지에 스무번째 봄이 왔다. 새 묘역은 망월동이 아니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이다. 그러나 다들 망월동이라고 부른다. 새 묘역의 유영 봉안실에는 1980년 5월에 총맞아 죽고 매맞아 죽은 사람들 3백여 명의 사진이 걸려 있다. 교복 차림 고등학생도 있고 웨딩드레스 차림의 신부도 있다. 손수레나 청소차에 실려온 주검들이다. 다들 사진틀을 깨뜨리고 세상으로 걸어나올 것처럼 생생하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라고 광주 시인 김준태는 1980년 6월 2일자 [전남매일] 지면에서 통곡했다. 그 시를 발표하고 김준태와 편집국장 대리 문순태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때의 시인은 무등산을 부르며 통곡했고, 지금 신묘역의 묘비명들도 무등산을 부르며 통곡하고 있다. 새 묘역에서 무등산은 지척이다. 광주에서, 그때의 피해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상처를 자신의 혀로 핧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젊은 어머니 뱃속에 들어앉아 있다가 군홧발에 채었던 태아들이 다들 죽지 않고 이 세상에 나와 지금은 스무 살이 되었다.

 

  이추자 씨는 그때 임신 3개월 신부였다. 집 안에서 총을 맞았다. 오른쪽 눈 밑을 총알이 뚫고 지나갔다. 병원에서 수술받던 도중에 폭도로 몰려 병원 지하실에 끌려가 군인들한테 매를 맞았다. 이추자 씨는 그때 아무런 정치적 의식이 없었고, 그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다만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동그랗게 꼬부리고 매를 맞았다. 기형아를 낳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군인들이 임신한 배를 구둣발로 찼고, 이씨는 여러번 실신했다. 이 아이가 최효경이다. 광주여자대학 무용과 2학년이다. 핸드폰에 코알라 인형을 씌워서 들고 다닌다. 이추자 씨는 보험회사 외판원이다. 성격이 수줍어서 별 실적은 없다. 최효경 양이 엄마보다 더 잘 번다. 최 양은 학교가 끝나면 고속도로 광주 톨게이트 매표원으로 일한다. 최양은 한달에 80만원 쯤 벌어서 남동생 용돈까지 준다. 이추자 씨는 효경이를 낳고 나서 얼굴에 기미가 심하게 끼었다. 임신 중에 여러 번 총상 수술을 했고 그때마다 항생제를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도 이씨의 얼굴은 기미로 덮여 있다. 그래서 이씨는 화장을 두껍게 한다. 5.18 피해자라고 해서 남한테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 이씨는 말했다. "늘 단정하고 아름다운 여자로 보이고 싶다"면서 이씨는 딸을 끌어안고 웃었다.

 

  유복난 할머니는 1980년 5월 27일 세벽 5시에 안방에서 총을 맞았다. 그때 대학생이던 셋째 아들이 금남로에 나가서 쫓기던 청년 7명을 데리고 집으로 도망쳤다. 할머니는 군인들이 정권을 잡으려고 이 난리를 치는 것인줄 처음부터 알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청년들을 골방에 숨겨놓고 먹이고 재웠는데 군인들이 이 청년들을 잡으로 들어와서 총을 난사했다. 유복난 할머니는 광주 대인시장에서 반찬 장사를 하고 있었다. 왼쪽 유방 밑으로 총알이 박혔다. 할머니는 그 후로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지금까지 병석에 누워 있다. 할머니의 왼쪽 유방 밑에는 아직도 총알이 그대로 박혀 있다. 그 합병증으로 다른 여러 증세들이 도졌다. 총알을 빼려고 서울의 대학병원까지 갔었으나 빼지 못했다. 워낙 민감한 부위에 총알이 박혀 있어서 외과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전문의 7~8명이 함께 수술에 참여해야 하는데, 병원에서는 이걸 못하겠다고 하더란다.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으나 모두 다 허사였다. 그래서 할머니는 네 아들을 젖 먹여 키운 유방 속에 총알을 지니고 산다. 그러니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할머니는 총알을 품고 죽어야 할 모양이다. 의사는 어디에 있고,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때는 총알을 빼내기가 수월할 것이다.

  할머니가 총에 맞을 때, 할머니의 둘째 손자가 태어났다. 이 이아이가 김건 군이다. 금년에 교원대학교에 입학했다. 할머니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입학식에 갔었다. 총에 맞고 나서 그날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할머니는 입학식장에서 손자의 볼을 부비며 울었다고 한다.

 

  이 세영 씨는 1980년 5월 21일 오전 오전 11시 도청 앞 시위 때 총을 맞았다. 지금은 목발을 짚고 다닌다. 이세영 씨는 초등학교만 나와서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이세영 씨의 꿈은 구둣가게를 차려서 밥 안 굶고 사는 것이었다. 정치며 사회며 권력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5월 18일에는 권투선수 박찬희의 타이틀 매치가 5회 KO로 끝나는 걸 보고 친구들을 만나러 거리에 나왔다가 행진하는 군인들을 보면서 "공수부대는 과연 멋지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군인들한테 붙잡혀서 무조건 두들겨 맞았다. 맞고 나니까 도대체 왜 맞았는지를 알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그의 의문은 시작되었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마구 쏘아죽이는 걸 보고 나서야, 저자들을 저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그는 도청으로 향하는 시위 대열에 끼여들었다. 복부에 총알 두발을 맞았다. 척추가 관통되어 다리를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몸을 쓸 수 없게 되자 구둣가게 꿈은 끝났다. 그는 불구가 된 몸으로 1990년에 결혼했다. 그의 아내는 전남대학교 국문과를 중퇴한 김길순 씨다.

  이들의 사랑은 광주에서 어느 정도 유명한 로맨스다. "아내의 사랑에 기대서 산다"라고 이세영 씨는 말했다. 이씨의 아내도 노동운동에 헌신했었다. 부부는 5.18 묘역 앞에다 작은 점포를 얻어 꽃가게를 차렸다. 초등학교 다니는 남매를 두었다. 꽃가게에서 한 달에 120만 원을 번다. "그만 하면 견딜 만한 가난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부부가 함께 가게에 나와 꽃을 다듬고 물을 준다. 망월동 묘지에 참배 가는 사람들은 대개 이 가게에서 꽃을 산다.

  5.18 민중항쟁 20주년을 맞는 광주에서는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소설가 임철우의 장편소설 [봄날]이 연극으로 꾸며져 광주 공연을 앞두고 있고, 시인 황지우는 <5월의 신부>라는 시극을 무대에 올린다. 임철우는 이 시대의 용서와 화홰가 가능한지를 고통스럽게 묻고 있고, 황지우는 치욕 속에서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산 자의 슬픔을 절규하고 있다. 삶은 소설이나 연극과는 많이 다르다. 삶 속에서는 언제나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다.

 

  구둣가게는 깨졌지만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요

 

  목발을 짚고 꽃가게를 경영하는 총상 피해자 이세영 씨와 나눈 대화는 다음과 같다.

  "처음부터 그 사태에 대한 인식이 있었나?"

  "전혀 없었다. 나는 그때 전두환이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나는 구둣가게를 갖는 것이 꿈이었다. 두들겨 맞고 나서, 총에 맞고 나서, 이 사태가 무슨 사태인지를 알게 되었다."

  "총을 쏘는 군인들을 향해 달려갈 때 무섭지 않았나?"

  "너무나도 무서웠다. 너무나도 무서웠기 때문에, 그 무서움이 갑자기 분노로 바뀌었다. 그때 온몸이 떨렸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 군인의 총에 맞아 죽어야 하는 지를 지금도 알 수 없다."

  "자녀들이 아버지의 목발에 대해서 묻지 않는가?"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아빠는 왜 목발을 짚느냐고 물어온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나?"

  "옛날에 다쳤다고 대답했다."

  "군인과 총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나?"

  "말하지 않았다. 내 아이들이 군대 전체와 국가 권력 전체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발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깨어진 구둣가게 꿈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 목발 때문에 나는 세상과 이웃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요서와 화해는 불가능한가?"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가해자들은 아무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화해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개인의 심정으로는 만일 용서를 빌어온다면 부둥켜 안고 통곡하고 싶다. 그러나 그런 일이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