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1)

그림자세상 2010. 1. 30. 20:59

봄 산의 연두색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수목의 비린내는

산새의 복받침으로 인간의 넋을 흔들어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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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 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을 울린다.  

  그래서 '숲'은 늘 맑고 깊다. 숲 속에 이는 바람은 모국어 'ㅜ' 모음의 바람이다. 그 바람은 'ㅜ' 모음의 울림처럼, 사람 몸과 마음의 깊은 안쪽을 깨우고 또 재운다.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 속에 온 것 같다. 숲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보다도 훨씬 더 사람 쪽으로 가깝다. 숲은 마을의 일부라야 마땅하고, 뒷담 너머가 숲이라야 마땅하다.

  서울의 종묘 숲이나 경주의 계림, 반월성의 숲은 신성한 숲이다. 그 숲들은 역사의 정통성과 시원의 순결을 옹위하고 있다. 파고 또 지는 왕조들은 썩어서 무너져갔어도, 봄마다 새잎으로 피어나는 그 무너진 왕조들의 숲 속에서 삶은 여전히 경건하고 순결한 것이어서 종묘의 숲과 계림의 숲은 그 숲에 가해진 정치적 치욕에 물들지 않는다. 그 숲은 깊은 산속 무인지경의 숲이 아니라, 사람 사는 동네와 잇닿은 마을의 숲이다. 울창한 숲이 신성한 숲이 아니고, 헐벗은 숲이 남루한 숲이 아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숲도 초라하지 않다. 숲은 그 나무 사이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낯선 시간들의 순결로 신성하고, 현실을 부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불온하다. 유림의 숲은 불온하고, 유가적 가치와 질서로부터 소외되어 숲으로 모여든 무리로서의 산림은 더욱 불온하고, 소외된 무장 집단으로서의 녹림의 불온은 이미 작동하는 불온이다. 가장 늙은 숲이 가장 새로운 숲이다. 숲의 힘은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살려내는 것이어서, 숲 속에서 시간은 낡지 않고 시간을 병들지 않는다.

  이 새로움이 숲의 평화일 터인데, 숲은 안식과 혁명을 모두 끌어안는 그 고요함으로서 신성하다. 시간을 소생시키는 숲의 새로움은 퇴계와 로빈후드를 동시에 길러내고도 사람 지나간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물리적 자연은 근본적으로 몰가치하다. 물리적 자연이 그 안에 윤리적 가치를 내포한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그것은 영원한 인과법칙의 적용을 받는 자연과학의 자리일 뿐이다. 이 무정한 자연이 인간을 위로하고 시간을 쇄신시켜주는 것은 삶의 신비다. 사람의 언어가 숲의 작동 원리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숲이 사람을 새롭게 해줄 수 있는 까닭은 숲에 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숲이 숨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면도는 태안반도의 남쪽으로 길게 뻗은 섬이다. 안면도를 건너서 섬으로 들어온 자전거는 섬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649번 지방도로를 따라서 섬의 남쪽 끝인 고남리 젓개포구로 간다.

  안면도를 넘어서면 창기리, 승언리, 중장리 마을의 산과 들에 소나무숲이 펼쳐진다. 소나무숲을 만나면 자전거는 포장도로를 버리고 숲길로 들어선다. 안면도의 소나무숲은 마을의 숲이다. 대문 밖이 숲이고, 밭이 끝나는 곳이 숲이고, 울타리 너머가 숲이다. 숲의 신성은 멀고 우뚝한 것이 아니라 가깝고 친밀해서 사람의 숨결을 따라 몸 속으로 스미는 것임을 안면도 소나무숲 속에서는 알겠다. 안면도 소나무숲 속에서는 50년에서 90년 된, 혈통 좋은 소나무들이 우뚝우뚝하고 듬성듬성하게 들어서 있다.

  추사는 <세한도> 발문에서 "겨울이 깊어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우뚝함을 안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했지만, 이것은 사실 소나무에게는 좀 심한 말인 듯싶다.

  그 말은 소나무의 우뚝함에 바쳐진 말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내면의 가파름에 바쳐진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세한도> 속의 나무는 소나무도 아니고 잣나무도 아니고,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의 나무일 뿐이다. 그 나무는 가파른 이념의 힘으로 이 세계와의 불화를 뚫고 솟아오르는 정신의 나무다. 그 나무는 우뚝한 높이만큼 불우하다.

  봄의 안면도에서는 겨울을 다 지난 후에도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곧고, 높고, 힘센 나무들이 자존의 거리를 정확히 유지하면서 숲을 이루어, 나무들의 개별성은 숲의 전체성 속에 파묻히지 않는다. 안면도의 소나무들은 붉고 곧은 기둥을 높이 올려가다가 맨 꼭대기에서만 가지가 퍼지고 잎이 돋는다. 아무데서나 가지를 뻗어 늘어뜨리지 않는다.

  그 소나무들은 음풍농월의 충동과는 거리가 멀다. 소나무들은 경건하고도 단정하다. 안면도의 소나무들은 밑둥의 껍질은 검고 두껍지만, 사람의 키를 넘는 높이부터는 껍질이 얇아져서 종이 한 장을 바른 정도이고, 거기서부터 나무의 붉은색이 드러난다. 이 붉은색은 빛을 내뿜는 색이 아니라 빛을 나무의 안쪽으로 끌어들여 숨기려는 붉은색이다. 그래서 안면도 소나무숲 속에서는 앞을 바라보면 붉은 숲이고 위를 쳐다보면 푸른 숲이다.

  봄의 소나무숲은 다른 활엽수림의 신록처럼 화사하지도 않고, 들떠 있지도 않다. 봄의 소나무숲은 겨울을 견뎌낸 그 완강한 푸르름으로 진중하면서도 깊게 푸르다. 안면도의 소나무들에게는 안면송이라는 고유명사가 있다. 

  이 소나무들은 <세한도> 속의 소나무처럼 이념화한 불우의 그림자가 없고, 경주 남산 선덕여왕릉 주변의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처럼 의고풍의 비극성이 없고, 산전수전의 귀기가 없다. 나무 꼭대기에 퍼진 잎들은 멀리서 보면 가지를 떠나서 날아갈 듯한 구름 조각으로 떠 있다. 안면도의 소나무들은 과도한 풍류와 과도한 표정을 안으로 다스려가면서, 높고 곧고 푸르다.

  안면도에서는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달려도 이처럼 잘생긴 소나무숲이다. 안면도를 떠날 때 비가 내려, 젖은 숲은 젖은 향기를 품어 냈다. 숲의 신성은 마을 가까이에 있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오대산의 전나무숲과 가리왕산의 단풍나무숲과 점봉산의 자작나무숲 들도 일제히 깨어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