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지상의 양식-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1)

그림자세상 2009. 12. 5. 12:58

* 1927년 판에 붙이는 <머리말>


  나는 [도망과 해방]의 안내서인 이 책 속에 흔히 나 자신을 가두어 두려고 하기가 일쑤이다. 이번 신판의 기회를 이용하여 새로운 독자들에게 몇 가지 생각을 피력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 책이 차지할 위치를 밝히고 더욱 뚜렷이 그 동기를 설명함으로써 그 중요성의 한계를 그어 놓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 <<지상의 양식>>은 병을 앓는 사람이 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회복기의 환자나 완쾌된 사람 혹은 전에 병에 걸렸던 적이 있는 자가 쓴 책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하마터면 그 시적 비약 속에서조차 잃어버릴 뻔했던 그 무엇인 양 삶을 다시 꼭 부둥켜안으려는 자의 과격성이 있다.


  2. 문학이 몹시도 인공적 기교와 따분한 냄새를 풍기던 시기에 나는 이 책을 썼다. 당시 나에게는 문학으로 하여금 다시 대지를 딛고 순박하게 맨발로 흙을 밟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되던 때였다. 얼마나 이 책이 그 시대의 취미와 충돌하였는가는 그 당시 이 책의 출판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로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도시 이 책을 언급한 비평가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10년 동안에 겨우 5백 부가 팔렸을 따름이다.


  3.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내가 결혼에 의해 나의 생활을 정착시킨 직후의 일이다. 당시 나는 자진하여 자유를 포기하였지만, 그러자 곧 예술작품으로서의 나의 책은 그럴수록 더 그 자유의 회복을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쓸 때 지극히 성실한 심경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마음속에 느끼던 반대 감정에 있어서도 또한 나는 진실하였었다.


  4. 이 책에 나는 구애되지 않을 생각이었다는 것도 덧붙여둔다. 내가 그린 부동적이며 얽매임 없는 상태, 마치 소설가가 자기와 흡사하면서도 일면 창작으로 꾸며 내는 주인공의 모습을 결정짓는 것처럼 나는 그러한 상태의 윤곽을 잡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생각하여 보면, 당시 나는 그 특징적인 모습을 일단 나로부터 분리시켜 놓지 않고서는 묘사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혹은 나 자신을 그러한 모습으로부터 일단 분리시켜 놓지 않고서는----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5. 사람들은 흔히 이 청춘 시절의 책으로써 나를 비판하려 들기가 예사이다. 마치 <<지상의 양식>>의 윤리가 나의 전 생애의 윤리이기라도 한 듯이, 또는 내가 나의 젊은 독자에게 일러준 [나의 책을 던져 버려라, 그리고 나를 떠나라]는 충고를 누구보다도 먼저 나 자신이 따르지 않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렇다, 나는 <<지상의 양식>>을 쓰던 때의 나를 곧 떠나 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애를 살펴 볼 때 내가 인정하게 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지조이기는 커녕 차라리 변함 없는 충실성이다. 이 감정과 사상의 깊은 충실성, 나는 그것을 지극히 희귀한 것으로 믿는다. 죽음이 눈앞에 닥쳐왔을 때 자기가 성취하려고 스스로 다짐했던 것이 성취되었음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 나는 바로 그들 곁에 [나의] 자리를 잡으리라.


  6. 또 한마디---어떤 사람들은 이 책 속에서 다만 욕망과 본능의 예찬밖에는 볼 수 없거나 혹은 오직 그것만을 보고자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좀 근시안적인 소견인 듯하다. 내가 이 책을 다시 펼쳐들 때 거기서 보는 것은 그런 것보다도 [헐벗음]의 옹호이다. 그것이 바로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도 내가 여전히 간직한 것이요, 내가 여전히 충실한 채로 있는 것도 그것에 대해서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것이지만, 내가 그 뒤 복음서의 교리를 따라 자기멸각 속에서 가장 완전한 자기 완성, 가장 드높은 요구, 그리고 행복의 가장 무제한한 허용을 발견하기에 이른 것도 실로 그 [헐벗음]의 덕분이었다.

  [나의 이 책이 그대로 하여금 이 책 자체보다도 그대 자신에게---그 다음으로는 그대보다도 다른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도록 가르쳐 주기를.] 이것이 그대가 이미 <<지상의 양식>>의 머리말과 마지막 구절에서 읽을 수 있었던 말이다. 또다시 그 말을 나로 하여금 되풀이하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1926년  7월         ----A. G.


  내가 이 책에 붙이기로 한 난폭한 제목을, 나타나엘이여, 오해하지 말라. [메날끄]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메날끄는 그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때껏 세상에 존재한 일이 없는 인물이다. 이 책에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의 이름은 나의 이름뿐이다. 허나 그렇게 되면 어떻게 내가 이 책에 내 이름을 감히 서명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허식도 수치심도 없이 이 책을 썼다. 그리고 때로는 본일도 없는 고장들, 맡아 보지도 않은 향기들, 하지도 않은 행동들에 관한 이야기를--혹은 아직 만나 보지 못한 그대 나타나엘에 관한 이야기를--나는 하고 있지만 그것은 허위로 한 일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도, 나의 책을 읽게 될 나타나엘이여, 장차 그대가 가지게 될 이름을 몰라 내가 그대에게 주는 이 이름과 마찬가지로 거짓은 아닌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에는 이 책을 던져 버려라---그리고 밖으로 나가라. 나는 이 책이 그대에게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을 일으켜 주기를 바라고 있다---어디서든지 그대의 도시로부터, 그대의 가정으로부터, 그대의 방으로부터, 그대의 사상으로부터 탈출하라. 만약 내가 메날끄라면, 그대를 인도하기 위하여 나는 그대의 오른손을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왼손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고, 거리에서 멀어지자 나는 되도록 빨리 잡았던 손을 놓아 주고 말하였을 것이다---[나를 잊어 버려라]하고.

  이 책이 그대로 하여금 이 책 자체보다도 그대 자신에게---그 다음으로는 그대보다도 다른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도록 가르쳐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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