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표정은 깜찍하고 새침하다. 뾰로통한 낯빛처럼 보이기도 한다. 살집이 도톰한 얼굴에 눈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다. 오른쪽으로 잔뜩 몰린 눈동자도 기막히다. 그녀는 어깨 위의 연꽃을 곁눈질로 살피는 낌새다. 물론 촛대에 꽃힌 촛불이 꺼지지 않는지 감시하는 눈초리다. 하지만 감상하는 이에 따라 달라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누구를 닮았을까. 아무래도 시든 연꽃에 애끓는 충선왕의 여인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연꽃의 아름다움을 시샘하는 여인네가 어울린다. 그렇다면 멀리 갈 것도 없다. 조선 정조 시대에 '부용'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있었다. 부용은 연꽃의 다른 이름이다. 부용은 시 잘 짓는 기생으로 양반인 김이양의 소실이 되었다. 이름이 말하듯 그녀는 연꽃처럼 아름다웠다. 부용은 자신의 미모와 재치를 자랑하는 시 하나를 지었다. 그녀의 이름을 겹쳐가며 읽어보자.
부용꽃 피어 못 가득 붉은데 芙蓉花發滿池紅
남들은 부용이 나보다 예쁘다고 하네 人道芙蓉勝妾容
아침나절 내가 둑 위를 걸어가면 朝日妾從堤上過
어찌해 사람들은 부용꽃을 보지 않는가 如何人不看芙蓉
이 시에서 부용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 사람들은 연꽃이 내 얼굴보다 다 예쁘다고 말하지만, 정작 내가 걸어가면 연꽃은 보지 않고 나만 쳐다본다는 것이다. 은근히 자신의 용모를 뻐기는 재기발랄한 시다. 연꽃은 꽃보다 향기가 윗길이다. 비길 데 없이 청량하다. 오죽하면 그 향기로 차를 만든 여인이 있었을까. 청나라 수필문학의 백미인 [부생육기]에 나오는 운이란 여인이 그 주인공이다. 운은 연꽃 봉오리가 입 다물 무렵 얇은 천에 찻잎을 싸서 넣었다가 다음 날 입을 벌릴 때 끄집어내어 차를 끓였다고 한다. 그 맛이 어땠을까. 차에 스민 연꽃 향내는 고혹적이다. 중국문학사상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 운이 탄생할 만한 맛이라고 할까.
여름날 뙤약볕 아래 핀 백련은 눈이 시리도록 정결하다. 백련은 고고한 기품이 감돈다. 홍련은 붉은색을 자랑하지만 지나치 교태와는 거리가 멀다. 야하지 않아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군자의 처신과 닮았고, 요조숙녀의 정조와 가깝다. 연꽃은 심산유곡에 피는 난초와 다르다. 연못은 원래 연꽃이 피는 못을 뜻하지만, 연꽃 없는 못도 연못이라 부를 정도로 익은말이 되었다. 여성의 이름에 '연꽃 연'자는 또 얼마나 많이 쓰는가. 해서 연꽃은 새물내 나는 군자의 꽃이자 신분을 떠나 두루 사랑받는 꽃이 된다.
원나라 도자기에 등장한 여인은 조선 기생 부용도 아니고, 충선왕의 연인도 아니다. 그러나 연꽃의 눈부신 용모를 질투하는 마음, 연꽃이 시들어가는 것을 보며 순정이 식었다고 하소하는 마음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여인의 속정이기도 하다.
'Texts and Writings > 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 안에 꽃 들여 놓으시지요 (0) | 2010.08.04 |
---|---|
입 다문 모란, 말하는 모란 (0) | 2010.08.01 |
연꽃 있는 사랑이야기(1) (0) | 2010.07.21 |
지나가는 것이 지나가는구나(2) (0) | 2010.07.21 |
이중섭의 소가 맛있는 이유 (0) | 2010.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