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꽃 피는 삶에 홀리다-손철주

쪽빛 바다에 떠도는 한 조각 붉은 마음(3)

그림자세상 2011. 6. 4. 16:44

기다림 속에 번지는 붉은 색

 

바다가 아닌 뭍에 자리한 박경리의 묘소에는 붉은 꽃이 피었다. 누가 가져다놓았는지 봉분 곁에 붉은 수련 하나가 고무통에 담겨 있었다. 묘소에서 보면 한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데 미륵산과 장군봉이 좌우에 버티고 있다. 젊어 시인을 꿈꾸었다는 소설가는 이 세상이 외롭고 쓸쓸한 곳임을 진작 간파한 모양이다. 그의 <판데목 갯벌>이란 시가 쓸쓸함을 추억한다. '판데목'은 통영 앞바다의 수로 이름이다.

 

피리 부는 것 같은 샛바람 소리

들으며

바지락 파다가

저무른 서천 바라보던

판데목 갯벌

아이들 다 돌아가고

빈 도시락 달각거리는

책보 허리에 매고

뛰던 방천길

세상은 진작부터

외롭고 쓸쓸하였다

 

외롭고 쓸쓸한 세상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그의 심사는 <우주 만상 속의 당신>이란 시에서 발각된다.

 

내 영혼이

의지할 곳 없어 항간을 떠돌고 있을 때

당신께서는

산간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그렇지요

진작에 내가 갔어야 했습니다

당신 곁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찔레 덩쿨을 헤치고

피 흐르는 맨발로라도

......

백발이 되어

이제 겨우겨우 당도하니

당신은 먼 곳에 계십니다

절절히 당신을 바라보면서도

아직 한 발은 사바에 묻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한 발은 사바에, 또 한 발은 열반에 두고 있는 존재는 없는 법이다. 두 곳에 같이 발을 묻은 존재가, 만에 하나 있다면, 그는 사랑에 빠진 사람일 것이다. 고통과 열락이 그의 것이다. 통영에서 이루어진 사랑도 무릇 다르지 않다.

 

통영은 항구다. 쪽빛 하늘을 이고 쪽빛 바다를 끼고 있는 항구다. 항구는 고깃배만 오가는 곳이 아니다. 항구에는 그리움과 헤어짐이 공존하는 이미지가 있다. 통영항에는 해마다 이별의 눈물을 보태는 고려 시인 정시상의 남포가 없어도, 버들잎 푸른 객사에서 소맷부리 못 놓는 당나라 시인 왕유의 양관이 없어도, 헤어지는 사연이 파도처럼 넘실댄다. 정인들이 품은 그리움에 비기면 통영의 하늘인들 통영의 바다인들 넓고 깊으랴. 당말의 여류시인 이계란의 시다. 

 

사람들이 말하길 바닷물이 깊다지만

내 그리움의 반에도 못 미치지

바닷물이야 오히려 끝이 있지만

그리움은 아득해 가장자리가 없다네

 

향리도 아니면서, 그것도 멀고 먼 타관인 평북 정주 사람이면서, 통영의 여인이 그리워 상사시를 줄곧 써댄 백석도 그리움의 끝 갖 데를 찾지 못한 시인이다. 백석이 친구의 결혼식에서 조우했다는 남이라는 여인은 그 아름다움이 비길 곳 없어 시인의 가슴에 묻었단다. 시인은 수줍게 속삭인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움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산새에도, 해오라기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움이 깊으면 헤어짐의 예감이 두렵다. 백석의 시 <통영>을 보면 두려운 예감이 동백의 붉은 잎처럼 눈을 찌른다.

 

난이라는 이는 명절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난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백석의 친구와 결혼한다. 통영의 해안을 따라 동백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은 나그네의 눈에도 낯설지 않다. 붉디붉은 꽃잎 대신 열매가 송글 맺힌 동백을 바라보니 백석의 눈물처럼 단단하다.

 

정주 사람 백석은 타향의 여인을 멀리 두고 그리워했지만, 통영 시인 유치환은 타향에서 흘러들어온 이영도 시인을 지척에 두고 속정을 끓였다. 청마문학관에서 듣건대 그가 이영도에서 보낸 편지 수는 이십 년에 걸쳐 오천 통이라고 한다. 문단에선 이영도를 일컬어 흔히 '기다림의 시인'이라고 한다. 누가 누구를 더 기다렸는지는 유치환의 시 <그리움>이 귀뜀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닥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백석의 애달픈 인연은 동백꽃 붉은 날에 마감했다. 유치환의 상사는 붉은빛 양귀비로 맺힌다. 붉은 마음이 서로 닮았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헐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유치환의 <행복> 중에서

 

통영의 사랑은 그리움도 기다림도 헤어짐도 붉은빛이다. 한 조각 붉은 마음이 통영의 쪽빛 하늘과 바다에 떠다닌다. 잿빛 흉흉한 도시의 나그네들이여, 처연하게 붉고 선연하게 푸른 통영으로 가라. 가거들랑 폐부와 심장을 꺼내들고 바다에 씻어라. 돌아오는 그대의 가슴은 기어코 사랑과 열망으로 출렁거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