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My poems

낡은 핸드폰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그림자세상 2011. 4. 2. 20:41

낡은 핸드폰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여 국 현

 

 

안팎으로 안개 자욱한 오후

어둠이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나 앉은 책상

한 모퉁이에 뽀얗게 먼지에 덮힌

낡은 핸드폰

 

버리지 못하는 것도 병이다

 

별스런 생각없이 들고

먼지를 턴다

버튼을 눌러본다

작동하지 않는다

 

하릴없는 시간은 고통을 낳는다

 

전원을 연결하고 다시 버튼을 누른다

전화는 되지 않지만 전화기는 살아 있다

기억의 한켠에서 흐릿해지거나 더러 지워진 기억들이

낡은 핸드폰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작고 흐릿한 화면 위로 아스라한 이름들이 스쳐 가고

낯익은 노래들이 깜빡이며 흘러간다

 

하릴없는 시간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부른다

 

멈춰야했을까

몇몇 일상의 사진들이 무심코 지나갈 때 그만

멈춰야했을까

 

철렁! 

그 사진들

무선 크레인에 올라 전율하며 담아두었던

그날 그 모습들 

덜컥, 눈도 가슴도 내려앉지만

전화기를 덮지 못한다

 

하릴없는 시간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불러오지만

고통은 슬픔보다 크지 않고

슬픔은 그리움보다 크지 않다

 

늦은 밤 술 취한 목소리로

그는 이 번호로 전화하곤 했었다

 

책상 한켠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낡은 핸드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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