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My poems

낯익은 그림자

그림자세상 2011. 4. 3. 00:10

낯익은 그림자

 

여 국 현

 

 

낯선 거리의 낯익은 골목에서 헤맸다

폐가들만 즐비한 좁은 길은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지고

굳게 닫힌 녹슨 철제 대문들과 담벼락에는

붉은 페인트로 철거 혹은 X표시가 서둘러 휘갈겨져 있었다 

움푹 패여 빗물 고인 아스팔트에 박힌 희미한 가로등은

꺼질듯 졸린 눈을 겨우 뜨고 무심하게 깜빡였다

 

그림자가 골목 저편에서 휙 지나갔다

 

어린시절 광이 넓고 마당엔 실한 석류나무가 있던 집

앞에 좁은 골목이 있었다

어둠이 일찍 찾아오는 골목길엔 

탱자나무가 가시유령처럼 늘어서 있었다

가끔 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은 무서웠다

잰걸음으로 돌아오는 길

탱자나무 가시들 사이로 소름돋는 끔찍한 비명이 들리고

뒷덜미를 잡아채는 알 수 없는 그림자는

언제나 막걸리 주전자를 걸고 넘어졌다

 

바람이 견딜 수 없이 시렸던 어느 겨울 이후 

우리만 남게 되었을 때

골목길 달음박질은 그의 몫이 되었다

유난히 겁이 많았던 그는

때로는 고구마를 때로는 튀김을 사러

탱자나무 즐비한 골목길을 내달아 

내키지 않는 달음박질을 해야만 했다

나는 더러 그를 윽박질렀다

석류가 유난히 빨갛게 익었던 어느 해 저녁 

나는 그의 뺨에 석류보다 더 빨간 손자욱을 남기며

그를 어두운 그 골목으로 내몰기도 했다

울며 나간 그는

축축해진 종이봉지 속에서 물컹물컹해진 고구마를 들고

울며 돌아왔다

제대한 그와 막걸리를 마실 때

술 취한 목소리로 그는 띄엄띄엄 말했다

공수특전단 고공낙하보다 그때 그 밤이

더 무섭고 더 아팠다고

 

재개발 공사로 인적 끊긴 좁은 골목길

흐릿한 가로등 사이로 석류보다 더 빨간 뺨을 한

낯익은 그림자가 휙 지나갔다

 

슬픔보다 아픔보다 미안함보다

그리움이 먼저 달려가다

그림자도 길도 잃고 헤맨 

좁은 골목 가로등 아래서

기다린다

 

석류보다 더 빨간 뺨을 한

낯익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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