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무기의 땅, 악기의 바다 - 경주 감포

그림자세상 2011. 1. 10. 01:17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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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 국도는 경주 시내에서 토함산을 가로지르며 동쪽으로 나아가 감포 바다에 닿는다. 토함산 권역을 거의 벗어나는 어일리에서 4번 국도를 버리고 우회전하면 929번 지방도로이다. 929번 지방도로는 토함산 능선을 오른쪽으로 펼쳐 보이며 7킬로미터를 동남쪽으로 달려 감은사지 앞을 지나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의 바다에 닿는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그 종착점 너머의 세계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모든 길의 지향성은 세계적이며, 모든 길의 숙명은 역사적이다. 929번 지방도로는 경주와 감포읍 대본리의 바다를 잇는다. 이 한 도막 지방도로는 바다를 향하는 7세기 신라의 인후이며, 인간의 꿈의 힘으로 살육의 피를 씻어내던 신라의 지성소이다.

 

 

인간은 아늑하고 풍성한 곳에서 다툼 없이 살고 싶다. 낯설고 적대적인 세계를 인간의 안쪽으로 귀순시켜서, 그렇게 편입된 세계를 가지런히 유지하려는 인간의 꿈은 수천 년 살육 속에서 오히려 처연하다.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은 다르지 않다. 철제 무기의 경이로운 날카로움을 정련해가던 가야의 마지막 날들에, 우륵은 가야금을 완성한다. 그의 조국은 한 줄기 산세와 한 줄기 물길에 기대어 있던 부족 국가였다. 위태로운 조국의 마지막 순간에 우륵은 가야금을 들고 조국을 떠난다. 그는 적국인 신라의 진흥왕에게 투항했다. 그가 버린 조국의 이름은 그의 악기에 실려 후세에 전해졌고, 그의 악기는 신라 천년의 음악 바탕을 이루었다. 진흥왕의 팽창주의는 그가 남긴 순수비에 적혀 있는데, 아마도 역사 속에서, 진흥왕의 무기와 우륵의 악기는 비긴 것 같다.

 

 

 

7세기의 929번 지방도로에서, 전란의 시대를 살아가던 인간의 꿈은 무기에서 악기로 이행하고 있다. [삼국사기] 속의 7세기는 '수급 5백을 베었다' '수급 1천을 베었다' '수급 3천을 베었다'는 문장의 끝없는 연속이다. 자고 세면 베고 베이는 것이다. 수사적 장치가 전혀 없이 발가벗은 단문으로 기록되는 그 '목베기 시대'는 철제 무기의 성능 시험장 같은 인상을 준다. 통일 전쟁의 총사령관인 김유신 자신이 철제 도끼를 들고 사기에 등장한다. 고전적 단순성에 엄격한 김부식의 문장은 떨어져나간 목의 개수를 챙길 뿐, 떨어져나간 목의 고통을 기록하지 않는다. 매일매일의 목베기와 목베기 사이에서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기사는 가엾고 사소한 에피소드처럼 끼여 있다.

 

 

7세기의 수많은 전투는 매우 복잡하고도 무질서한 정치적 배후를 갖는다. 정치 집단들 사이의 호혜 평등에 따른 공존이란 불가능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잔존 군사력과 당의 원정군이 뒤엉켜 가변적 적대 관계의 중층 구조를 이루었다.

 

 

나, 당 사이의 정치 관계와 군사 관계는 파국적인 모순에 처해 있었다. 문무왕은 눈물겨운 저자세의 외교 문서를 당의 황제에게 보내 당나라의 도덕성과 우월성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한다. 그는 거의 빌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곧 군사를 동원해서, 한반도에 진주한 당의 군사력을 토벌한다. 수사를 아끼는 김부식은 그 시대의 피비린내를 이렇게 전한다.

 

 

들판마다 시체가 가득가득 쌓여 있었고, 흐르는 피에 방패가 떠내려갈 지경이었다.

 

 

문무왕의 유서는 [삼국사기] 전편에서 가장 장엄하고도 웅장한 글이다. 그 유서는 제왕의 문장으로 기록된 무기의 꿈이다.

 

 

나는 국운이 마침 어지럽고 전쟁하는 시대를 당하여 서쪽(백제)을 정벌하고 북쪽(고구려)을 토벌하여 능히 강토를 평정하고, 반역한 자를 치고 협조한 자를 불러와서 드디어 먼 곳과 가까운 곳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위로는 조종이 돌보아주심을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아비와 아들의 오랜 원한을 갚아주었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을 널리 추상하여 내외에 관직을 고루 나누어주었으며, 병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었고, 백성들을 인수의 경지로 이끌었다([삼국사기], 이재호 옮김).

 

 

문무왕의 단정적 어법에도 불구하고 무기에 대한 그의 꿈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은 끊임없이 불안정했고, 살육과 모반은 거듭되었다.

 

 

7세기의 바다에서 악기가 솟아오른다. 그 바다는 929번 지방도로가 끝나는 감포읍 대본리 바다이고, 그 악기는 만파식적이라는 이름의 관악기이다. 문무왕의 시신은 그이ㅡ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그 뼈가 대본리 앞바다 바위(대왕암)에 뿌려졌고, 문무왕은 동해에서 호국의 용이 되었다. 그리고 이 피리는 신문왕이 그의 아버지 문무왕의 혼백인 용으로부터 받은 피리였다. 용은 바다에서 솟아난 그 피리를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삼국유사]는 인간의 욕망과 글픔과 기쁨과 환상과 열망에 역사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삼국유사]는 현실의 역사이며 마음의 역사인 것이다. 만파식적에 대한 기록이 없었더라면, 7세기의 역사는 살육과 모반으로 지고 샌 불구의 역사에 불과했을 터이다. 삼국 통일이 어찌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왕이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해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삼국유사], 이재호 옮김).

 

 

하늘과 물뿐인 바다에 솟은 대왕암

 

무기의 아들로 태어난 신문왕이 무기의 아버지인 문무왕으로부터 하사받고 싶었던 치세의 도구는 무기가 아니라 악기였던 것이다. 세상의 슬픔을 쓰다듬고 바람과 파도를, 분노와 절망으로 출렁거리는 것들을 달래서 잠들게 하는 선율을 무기의 아들은 꿈꾸었던 것이다.

 

929번 지방도로는 무기에서 출발해 악기로 다가간다. 감은사터는 그 중간 지점에 있다. 감은사 창건 설화는 아직도 무기와 피의 냄새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감은사는 피에 칠갑 된 인간이 악기를 향해 걸어가는 과정의 중간 기착지쯤이 될 터이다. 그리고 그 3층석탑 한 쌍은 인간의 조형 능력이 나무에서 돌로 이행하는 과정의 중간 기착점인 셈이다. 

 

말복이 지나고 파라솔이 걷힌 대본리 바다는 거칠 것 없는 망망대해이다. 그 바다는 풍경이라고 할 수도 없는, 하늘과 물뿐인 바다이다. 대왕암 한 덩어리가 가까이 떠 있을 뿐이다. 

 

한국 미술사학의 선각자인 고유섭(1905~1933)은 이 바다에서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수필 한 편을 썼다. 이 수필의 제목은 지금 비석이 되어 대본리 바닷가에 서 있다. 

 

그에게 잊히지 못하는 것은 그 바다와 929번 도로의 역사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악기와 무기 사이를 오가는 인간의 꿈의 슬픔이었을 것이다. 7세기는 계속중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