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and Writings/자전거 여행-김훈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 안동 하회마을(3)

그림자세상 2010. 8. 14. 01:02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꿈을 동시 구현하는 집들

 

도산서원을 나선 발길은 하회 마을로 향하게 마련이다. 하회에 갈 때는 안동대 임재해 교수가 쓴 [민속마을 하회여행] 또는 [안동 하회마을] 같은 책을 읽어야만 하회의 두터운 문화적 층위를 이해할 수 있다.

 

임재해 교수는 하회의 아름다음이 '조화'에 있다고 말한다. 적대 관계나 갈등 관계에 놓일 수도 있는 수많은 대립 요소가 하회에서는 조화화 포용에 도달하해 있다.

 

양반과 상민, 유교 문화와 무속, 자연과 인간, 기와집과 초가가 강물 굽이치는 그곳의 빼어난 자연 경관을 무대로 삼아 조화와 공존을 이루며 화해로운 삶의 질감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 하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일 것이라고 임 교수는 말했다. 도산서당을 보고 나서 하회 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은 유가적인 삶의 풍요함과 너그러움에 아늑함을 느낄 것이다. 도산서당의 구조가 삼엄함 이념형이라면 하회 마을은 그 이념형이 삶의 현장에서 너그럽게 적용되면서 삶의 다양한 국면을 포용하고 쓰다듬는 생활의 조직원리고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회 마을에 관한 임재해 교수의 글은, 마을의 골목과 길이 뻗어나간 방식과 모습, 그리고 집들의 좌향을 분석하는 대목에서 엄정하고도 섬세한 감수성을 보인다.

 

마을 길이 아주 넓고 방사선형 체계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곧지는 않다. 골목길을 따라가보면 멀지 않은 곳에 담장이 눈앞에 막아서거나, 담장 사이로 길이 휘어지면서 그 꼬리를 감추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길과 집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길이 대문을 찾아 들어가려면 굽이를 틀 수밖에 없다. 마을의 골목은 그 자체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집의 분포에 따라 집과 집을 이어주는 소통 체계로 형성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길이 각 집의 방향에 따라 전면부의 출입구까지 이르려니 우회하여 돌아갈 수밖에 없다. 길의 전체적인 체계는 집의 분포가 결정하지만, 길이 흐르는 선은 집의 방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민속마을 하회여행])

 

하회의 집들은 서로 정면으로 마주보지도 않고 서로 등을 돌리고 있지도 않다. 하회의 집들은서로 엇비슷하게 좌향을 양보하면서, 모두 자연 경관을 향하여 집의 전면을 활짝 개방하고 있다. 길은 그 집들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가 각 집의 대문에 닿는다. 담장은 차단이고, 길은 연결이다. 길은 낮은 흙담을 따라 굽이친다. 차단과 연결이 함께 길을 따라 흐른다. 길은 대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이 집 저 집의 모퉁이를 돌아서 대문에 당도한다. 인간의 삶은 감추어져야 하고 또 드러나야 한다.

 

하회의 집들은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꿈을 동시에 구현한다. 길은 연결과 드러남의 구도이고, 집은 차단과 감춤의 구도이다. 길이 여러 집을 에돌아서 대문에 당도할 때, 그 길은 드러남과 감춤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다. 그 길은 익명성에 매몰되어 다만 기계의 신호에 따라 작동하는 고속도로가 아니다.

 

하회의 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여, 이웃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길은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사이를 지나서 인간의 안쪽과 바깥쪽으로 함께 뻗어 있는 길이다. 다시 대도시로 돌아가는 고속도로는 체증에 막혀 있었고, 교통 방송의 내용은 막힘뿐이었다.